brunch

14_산속을 날아다니는 일

한국에서 온 날다람쥐들

by 한경환

저 멀리에 보이던 돌산이 어느새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와 있었다.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발을 딯고 살아가고 있는 곳의 민낯이 드리날수록 툭툭을 가득 채우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누군가는 연신 셔터를 눌렀고 누군가는 눈에 담아냈다.

팔에 돋아난 소름을 보고 웃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경이로움이었다.

우리는 시간을 타고 이곳까지 흘러왔고, 시간이 지남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빛나던 청춘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한때의 푸르고 싱그럽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푸르름을 간직한 이곳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다니, 아이러니였다.


쉼 없이 달리던 바퀴가 멈추고 우리는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에서 내렸다.

내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길게 늘어선 줄의 끝으로 향했다.

기다림의 끝에는 집라인을 위한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멧을 눌러쓰고 보호장구를 착용한 후 장갑을 손에 끼웠다.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낯설었다.

낯선 설렘과 가느다란 긴장감이 손끝에서 시작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잠시 앉아서 한숨 돌리려했지만 어느샌가 준비가 끝난 이들을 작은 배에 실어 반대편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우리도 곧장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아래로 흘러가는 물결과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며 작은 배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폭이 넓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를 내려준 배는 우리를 내려주고는 곧장 출발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후는 등산의 시작이었다.

전에는 차를 타고 가파른 산을 올라갔던 것 같은데.

앞사람을 따라 무작정 산꼭대기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며 조금씩 숨이 가빠졌다.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오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아빠가 라오스에 엄청 오고 싶어 했었는데 만약 함께 온다면 아쉽지만 카약과 블루라군 1 정도만 예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와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10살 남짓 보이는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부모님과 함께 온 이 아이는 뒤처져 있는 엄마와 아빠를 뒤로한 채 혼자 씩씩하게 앞장서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아이도 올라가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아이를 보며 다시금 힘을 냈다.

그 작은 발걸음이 내 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씩씩하던 아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보이자 곧장 달려갔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아빠 곁에 바짝 붙어 안전요원의 설명을 듣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찡하게 했다.

씩씩해 보였어도, 결국은 아이였다.


집라인을 타기 전, 안전요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설명은 영어였지만 어렵지 않았다.

중간중간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어를 섞어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모두가 함께 어울려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희를 뚱뚱이라 부르며 뚱뚱은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모두 웃으며 긴장을 덜어낼 수 있었다.

고마워, 뚱뚱.

이제는 지금까지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었다.

맨 앞사람부터 한 사람씩 줄 하나에 몸을 싣고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앞 사람이 도착할 때쯤 다음 사람이 출발했다.

끊임없이 빠르게 줄어드는 통에 우리 차례가 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민정이는 조금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발끝을 가장자리에 놓은 뒤 심호흡을 하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뛰어들었다.

줄 하나에 매달려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공포를 이겨낸 뒤 터져나온 요상한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뒤이어 세희가 주춤거리며 앞장섰다.

평소에 겁이 많은 편이라 걱정이 많았었던 세희였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도 집라인이 무섭다며 집라인을 뺀 패키지가 어떤지 물어봤었기에 더욱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잔뜩 겁을 먹은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믿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수밖에.

세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뚱뚱, Let’s go!”


안전요원의 말에 얻은 것이 힘인지 짜증인지 모르겠지만 세희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긴머리가 바람에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짧은 비명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공포를 밀어내고 숲 속을 향해 뛰어든 순간이었다.

헬멧과 같은 색 옷을 입은 세희가 주황색 점으로 보일만큼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뒤로 몸을 힘껏 당겼다가 튀어나가듯 뛰어올랐다.

강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올라오는 동안 흘렀던 땀방울을 모두 식힐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강하고 기분 좋은 바람.

이 바람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숲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울창하고 아름다운 풍경들.

눈부신 초록빛이 온몸을 감쌌다.

그 안을 마치 한 마리의 날다람쥐처럼 날았다.

자유로운 기분이 발끝까지 퍼졌다.

손을 뻗으면 그 자유를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두 발이 땅에 닿았을 때 세희와 민정이가 잔뜩 신이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너무 재밌다며 흥분한 모습이 어린아이들 같았다.

그들의 설렘 가득한 후기는 민아가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우리 뒤에 도착한 아이가 더 점잖아 보일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집라인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올라온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왔던 만큼 내려오는 일도 길었다.

숲 사이를 가르며, 바람 속을 달리며, 수 없이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고 무서워했던 세희도 점점 자연스럽게 본인의 차례가 오면 자세를 잡고 뛰어내렸다.

처음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눈에는 이제는 즐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발전한 것이 비단 세희뿐만은 아니었다.

처음에 브레이크를 잡지 못해 끝에서 잡아주는 안전요원에게 박치기를 했던 민아도 이제는 완벽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이겨냈고 또 누군가는 멈추는 방법을 배웠다.

누군가는 자유를 즐기는 법을 배웠고 또 누군가는 빛나던 청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


사실 친구들에게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 집라인의 끝에는 약간의 번지점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집라인을 타는 것조차 무섭다고 하는 이들에게 번지점프를 해야 한다고 알려줘 버리면 안 하겠다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집라인을 타고 도착지에 섰다.

마지막 사람까지 도착하자 설명이 시작되었다.

설명은 짧고 굵었다.

줄을 잡고 바닥의 구멍으로 뛰어내리기.

다들 기대반 걱정반의 눈빛이었지만 맨 앞의 건장한 남성의 출발과 함께 온통 걱정뿐인 눈으로 뒤바뀌었다.

건장한 남성인 그의 연약한 비명소리를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들 웃음을 터트렸지만 웃음이 끝나자 긴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특히 세희의 눈은 집라인 출발 직전의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변해있었다.


다행히도 무서워하는 이들을 위해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두려움에 찬 세희는 연신 계단을 찾았다.

무서우면 어쩔 수 없지,하며 세희를 계단으로 보내주려 했지만 오케이를 외치던 요원의 말과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세희와는 달리 의외로 민정이는 겁 없이 뛰어내렸다.

내가 내려왔을 때 세희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고 민정이는 싱글벙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민아까지 안전하게 착지하자 우리의 집라인은 끝이 났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하니 아까 건넜던 강이 나왔다.

다시 타고 왔던 작은 나무배를 타고 돌아갔다.

설렘을 가득 안고 타고 온 배에 즐거움과 추억을 가득 안고 다시 탔다.

이 순간들이 각자 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얻은 자유로운 즐거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즐겼던 집라인으로.

이 멋진 기억이 오랫동안 바래지 않기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게 빛이 나기를.

그런데 집라인 끝에 내려오는 계단은 진짜로 있던 걸까.

둘러봤을 때 계단 같은 것은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었을지도.

keyword
이전 14화13_설레는 일은 많을수록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