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속도보다 중요한 것
집라인을 끝내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달콤한 점심식사였다.
바게트 반쪽과 볶음밥, 그리고 꼬치 2개. 막 운동을 끝낸 우리에게 이 정도의 양은 걱정할 정도는 아니였다.
오히려 잠시 후에 방문할 블루라군 1에서 배가 나온 채로 사진을 찍히는 것이 걱정이었다.
나는 이미 나의 몫의 밥을 다 비운 후, 평소에도 양이 적던 세희의 식사까지 조금 빼앗아 먹고서야 식사를 끝냈다.
냉장고에서 꺼낸 물병을 손에 쥐자 손바닥이 서늘해졌다.
가볍게 뚜껑을 돌려 한 모금 넘기자마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함이 퍼졌다.
온몸을 감싸던 더위가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천천히 사라졌다.
태양 아래서 뜨겁게 쌓였던 더위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바로 다음 일정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카약을 탈 차례였다.
손등에 적힌 순서대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카약은 아까 집라인을 하러 건너갔던 강에서부터 출발이었다.
각자 팀을 나누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다른 팀의 사람과 한 팀이 되었다.
수줍음이 많지만 눈빛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 스며있는 내 또래의 남자분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카약 위에 올라타기 전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노를 저어 앞으로 이동하는 법이나 방향을 트는 법, 속도를 줄이는 법.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기술을 배우고 나니,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팀씩 물살을 가르며 출발했다.
배는 조금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결을 따라 흔들리면서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는 배.
마치 청춘의 걸음 같았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물 위를 반짝이며 내리쬐었다.
물 위에서 빛나는 윤슬에 눈에 닿는 풍경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강물 위로 퍼지는 빛의 조각들,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카약들.
내 기억 속 빛나던 청춘의 모습이었다.
“엇, 친구분들 배가 우리보다 앞서가는데요?”
어색한 공기를 풀어보려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럼 속도를 좀 내볼까요..?”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껏 노를 저었다.
하지만 경쟁심이 솟은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물살을 따라 조용히 흘러가던 카약들이 갑자기 하나 둘씩 속도를 높였다.
때아닌 경주가 시작됐다.
경주의 시작과 함께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먼저 출발한 세희의 뒤를 쫓았고 우리 옆의 민정이와 민아의 배도 속도를 올렸다.
잔뜩 벌어진 민정이의 입을 향해 물을 뿌렸다.
민정이도 우리 배를 향해 물을 뿌렸다.
“혹시 물… 좋아하세요?”
우리 배 옆에 바짝 붙어있던 민정이가 내 앞의 앉은 팀원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순간, 민정이는 작은 손으로 물을 퍼올려 그를 향해 가볍게 뿌렸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물을 됟로려 보냈지만 입가의 미소는 제법 그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때아닌 휴식을 즐긴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속도를 좀 내기 위해 노를 빠르게 저었다.
그때 계속 흔들리던 배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렸다.
우리 팀은 배가 거꾸로 뒤집혀 물에 빠져버렸다.
핸드폰을 죄다 방수팩에 넣으라는 말을 들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구명조끼 덕분에 물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지만 수심이 싶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민아와 민정이의 배가 다가와 우리 배를 잡아주었고 그 덕에 배 위로 올라탈 수 있었다.
다른 분도 위에서 끌어올려주었기에 쉽게 올라왔다.
물에 젖은 생쥐꼴이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잠시 멈춰 정비를 하고 다시 출발했다.
평화롭게 누워 내리쬐는 햇볕에 옷을 말리고 있을 때 배가 점점 빨라짐을 느꼈다.
갑자기 유속이 빨라졌던 것이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일어났다.
강물은 갑자기 강한 힘으로 우리를 끌고 나아갔다.
시야 한쪽에 다른 배가 보였다.
방향을 돌리려 애쓰는 그들은 결국 풀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을 흔들며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도 잠시 우리의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 멀어졌다.
남걱정 할 때가 아니라는 듯 우리의 배는 나뭇가지가 우거진 강 끝쪽으로 떠내려와 있었다.
노를 이용해 방향을 바꾸려 해 보았지만 물살이 강한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눈앞으로 뻗어있던 나뭇가지가 간발의 차이로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연달아 다가오는 가지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몸을 낮춰 물가에 낮게 자라 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쪽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정이의 말에 따르면 마치 액션영화 같았다며 칭찬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이 구간을 지나올 수 있었다.
다시 강 한가운데로 움직였고 물살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노를 젓지 않아도 찬찬히 강의 모양을 따라 유유자적하게 배가 움직였다.
세희는 함께 탄 가이드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뒤로 발라당 누워 쏟아지는 햇볕에 몸을 말렸다.
시원한 물에 발이 담가져 있어 덥지 않았다.
비가 온 뒤의 햇볕이라 뜨겁지 않았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 조용히 속닥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만이 귀에 들리는 전부였다.
다들 이런 소리만 듣고 살면 좋을 텐데.
도시의 소음과 익명 뒤에 숨은 비열한 말들, 차가운 관계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에서 잠시 벗어나 이곳에서 나를 감싸는 소리들만을 듣고 싶었다.
이 평화로운 순간은 곧 끝이 났다.
조금씩 소음이 더해지며 우리가 가장 아래쪽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하나둘씩 카약이 모래사장에 멈춰 섰다.
아까 물에 빠졌을 때 신발을 민아네 배에 올려두었기에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부드러운 모래가스며들었다.
넓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으며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도착한 곳의 아이들은 아까 집라인이 끝났을 때처럼 웃음이 가득했다.
서로 재미있었던 일들과 보았던 것들, 느꼈던 것을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대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5년 전에 보았던 어느 풍경 같았다.
쫄딱 젖은 채로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날.
맑은 하늘 아래로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걸어가는 사람들.
청춘에 쌓인 두터운 먼지를 한 꺼풀 또 벗겨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한 번, 반짝이는 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