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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_두려움이 지나간 자리

그 자리에 남는 것

by 한경환

패키지의 마지막 순서를 위해, 우리는 다시 툭툭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툭툭은 덜컹거리며 길을달렸고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이 툭툭은 우리를 블루라군 1에 내려다 줄 것이다.

물 수위가 높아져 동굴튜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도 불어오는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바퀴가 튀어 오를 때마다 눈 앞에는 현실같지 않은 풍경들이 이어졌다.

우뚝 솟아있는 바위산들과 넓은 평지를 자유로이 걸어 다니는 물소들.

시간마저 이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 같았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를 던네는 것 같았다.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들. 어쩌면 이 장면들이 튜빙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툭툭은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허름한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져있고, 그 안에서 여러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툭툭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블루라군 1로 향했다.

우리가 내린 지점에서 멀지 않았다.

2시 반까지 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했으니 우리에게는 약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블루라군 1로 들어가기 직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상점이 있었다.

색색의 음식들이 줄지어 놓여있던 그곳에는 한 아이가 열심히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꿈틀꿈틀. 낮은 바가지 안에서 애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내 손가락보다도 굵은 녀석들이 둥글게 몸을 말며 꼬물거리는 모습이 기묘하게 생생했다.

그리고 그 뒤편, 불판 위에는 같은 애벌레들이 꼬챙이에 꽂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민정아, 이거 하나 먹어볼까?”


“으악, 먹으려면 혼자 먹어!”

민정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숨을들이마시더니 괴물이라도 본 듯이 냅다 줄행랑을 쳤다.

웃으며 민정이를 따라 골목을 돌자 블루라군 1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맙게도 5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름처럼 푸르지는 않았지만 깊은 물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나무와 계단.

그 모든 것이 내 기억 속의 장면처럼 멈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물 속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평상에 앉아 음식을 먹거나 쉬고 있을 뿐, 아무도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

마치 블루라군이 멀리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아쉽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우리는 나누어준 구명조끼를 입고 성큼성큼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발끝부터 서서히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우리와 함께 툭툭을 타고 온 이들도 있었고 아침에 나와 함께 카약을 탄 팀도 있었다.

세희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나와 민정이, 민아는 물속 온도를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다.

그때 민정이가 말을 꺼냈다.


“우리 이제 다이빙하러 가자.”


블루라군 1의 중앙에는 아주 오래된,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 위에는 올라갈 수 있게 계단이 놓여있고 그 끝에는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는 구조물이 있다.

5년 전에 왔을 때 그곳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할 정동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장난을 치며 나무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웃음소리와 달리 마음 속에는 점점 겁이 차올랐다.

높이 올라갈수록 발이 무거워졌다.

나무 위는 생각보다 높았고 아래쪽 물 깊이가 5m나 된다는 문구도 내게 힘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천천히 올라가 마주한 풍경은 멋졌지만 눈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다.

풍경을 담기 전에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십 개의 까만 눈동자들이 먼저 보였으니까.

먼저 뛰려고 준비하던 민아가 겁을 먹고 망설이고 있었다.

뛸까 말까를 망설이기를 여러 번.

그 때, 뒤에 있던 민정이가 조용히 나섰다.


“잠깐만, 민아야.. 내가 먼저 가볼게.”


민정이는 난간끝에 발을 맞추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


그리고는 첨벙 소리가 들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민정이가 뛰어내렸다.

소심하던 민정이의 의외인 모습이었다.

부자를 향한 욕망이 겁을 집어삼킨 것일까.

민정이의 모습에 전해진 용기는 민아에게도 닿았고, 곧이어 민아마저 뛰어내렸다.

이제 내 차례였다.

발끝을 난간 끝에 맞추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은 아래쪽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휠씬 높게만 느껴졌다.

바람이 젖은 옷을 훑고 지나가며 차갑게 스며들었다.

추워서 떠는 걸까, 아니면 겁이 나서 떠는 걸까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래에서는 수십 개의 까만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라도 꼭 뛰어내리리라 다짐했다.

족히 수천 명은 밟고 서있었을 난간 끝에 서있던 발가락이 떨림을 멈추었다.

5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어린 날의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이곳에 올라선 순간에도 겁 없이 웃으며 코를 막고 뛰어내렸던 아이.

그 아이를 쫓아온 나였기에 그 아이를 따라 한 손으로 코를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렸다가 피면서 뛰어올랐다.

자유로움.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내 몸이 물과 가까워지는 순간에 느껴진 단 하나의 감정이었다.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자 그곳을 채워넣은 것은 자유라는 감정이었다.

줄을 타고 숲 속을 날아다녔을 때보다, 흐르는 강물에 맞춰 흘러갔던 때보다 더 깊은 해방가이 들었다.

물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순간, 민아와 민정이, 세희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은 늘 이렇다.

이겨내고 나면 정말이지 별게 아니다.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꽤나 재밌었기에 우리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뛰어내렸다.

서로의 다이빙에 박수를 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도 재미있어 보였나보다.

앉아서 구경만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물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찍이 앉아 구경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곧 물에 뛰어 들었다.

한 명, 두 명.

우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새 블루라군은 다시 생기로 가득 찼다.

이제 박수 소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의 언어로 감탄사를 내뱉고 뛰어내리는 사람마다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블루라군은 마침내 기억 속 그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서로 다른 곳으로부터 출발해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나이도 성별도 국가도 어느 것 하나 같은 것 없는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고 웃고 이야기하고 박수를 치는 일.

모두가 함께 였고 또 모두가 자유로웠다.

지금 이 순간은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한 기억으로 남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나무 근처에는 어느새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다이빙을 하기 위해 줄을 서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줄 끝에 그 아이가 있었다.

우리와 함께 숲 속을 날아다니던 작은 아이.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지만 잔뜩 긴장한 눈빛은 나를 볼 수 없었다.

그 작은 아이가 뛰어내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그게 궁금했던 것 같다.

아이가 올라가는 순간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점프했다.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월드컵에서 누군가가 골을 넣었을 때처럼.

아이는 그제야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인 채 헤엄쳐 나왔다.

하지만 잔뜩 상기된 볼과 입가의 웃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우리는 미리 맡아둔 자리에서 쉬기도 하고 다이빙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세희는 결국 다이빙을 하지는 못했지만 오늘 이미 한 차례의 두려움을 극복했으니 그걸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어쩌면 먼 훗날 오늘 하지 못했던 다이빙의 아쉬움에 다시 찾아오게 될지도 몰라.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다되었다.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떠나는 순간은 늘 아쉽다.

마지막으로 한 번씩 다이빙을 한 뒤 툭툭을 타러 갔다.

툭툭이 덜컹이며 출발하자 멀어지는 블루라군 1의 모습이 보였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도 멋지게 뛰어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장 큰 박수를 받아야지.

90살 정도 먹은 노인이 된다면 가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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