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로 툭툭에 올라탔고, 바퀴가 덜컹거릴 때마다 힘없이 몸이 같이 흔들렸다.
피곤에 절어 꾸벅꾸벅 졸면서도 이상하게 그 리듬이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어느새 도착한 곳은 숙소 앞이었다.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도 이렇게까지 잘 잘 수가 있나 싶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툭툭에서 내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놀고도 바로 다음 일정을 향해 출발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더 격렬하게 뛰어놀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동굴튜빙도 빠진 일정이었는데도 이렇게나 몸이 무겁다니.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출발할 때보다 2배는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며 숙소에 도착했다.
각자의 침대에 쓰러지 듯 드러누워 각자 찍은 사진들을 공유하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사진 속에는 우리의 하루가 가득했다.
민정이가 겁 없이 블루라군을 향해 뛰어내렸던 일, 겁을 먹은 세희가 장작 던져지듯 나무아래로 떨어졌던 것, 민아가 안전요원에게 몸통박치기를 했던 일까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지만 벌써 마음 한편에 추억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각자 공유된 사진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시작된 정적을 마침내 꼬르륵하는 뱃고동 소리가 깨버렸다.
각자의 위장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차례로 신호를 보냈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배고픔 앞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길을 걷다 간식도 좀 사 먹을 요량이었다.
벌써 여러 번 왔다 갔다 해 이미 동네처럼 익숙해져 버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어떤 가게가 나올지, 어느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올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우리가 바게트를 사 먹었던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 옆에 있는 가게도 가볼까?"
"아니, 민정이는 한놈만 팬대."
민정이의 확고한 신념 덕분에 우리는 방비엥 내내 이 가게만 찾았다.
어제는 이곳에서 바게트를 먹었다면 오늘은 다른 메뉴를 도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도전할 음식은 로띠(Lotee)라는 것인데, 얇은 판케이크를 바삭하게 튀겨 누텔라와 바나나, 연유 등을 함께 먹는 디저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솜씨로 로띠를 주문한 뒤에 또다시 망고주스와 아보카도 주스를 주문했다.
한 놈만 패는 것은 비단 민정이 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잠시 후 이쑤시개가 여러 개 꽂힌 로띠가 나왔다.
연유가 아낌없이 뿌려져, 접시 위에 하얀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달콤한 연유가 손끝으로 흘러내렸다.
입안에 넣는 순간, 바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한 조각씩 맛을 본 우리는 눈빛이 반짝였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달달하고 맛있는 음식을 1400원에 사 먹을 수 있다니!
매번 놀라지만, 이곳의 물가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로띠가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 간식은 멈출 때 때가 되었다.
이제는 진짜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었기에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할 수 없었다.
내일이면 방비엥을 떠나 루앙프라방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오늘마저 저녁식사를 놓친다면 다음 라오스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가는 길에 있는 수많은 유혹들을 뿌리치고 오늘의 목적지인 “피핑쏨”에 도착했다.
샤부샤부와 비슷한 음식을 파는 곳인데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지난번 라오스 방문 때도 맛있게 먹은 곳이라 다 같이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아쉽게도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지만 선풍기가 2대나 놓여 있는 로얄석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배가 고픈 우리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메뉴판부터 펼쳐 들었다.
먹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빈 공간이 가득한 위장을 준비해 왔다.
마치 빈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듯, 우리의 위장에 꼭 맞는 음식들을 채워 넣었다.
고기 4인분과 볶음밥, 쌀국수, 육포를 닮은 이름 모를 무언가까지.
우리가 앉은 6인용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냄비에 육수가 부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기부터 올렸다.
빠른 속도로 익어가는 얇은 고기, 그 위에 채소를 듬뿍 넣고 계란 하나를 톡 터뜨렸다.
국물 속에서 익어가는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비주얼.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고기가 익는 동안 쌀국수와 볶음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뜨끈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일품인 쌀국수, 기름이 자박하게 밴 볶음밥.
이제야 몸속까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잔뜩 굶고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수 안에서 푹 익은 야채더미에 그보다 더 잘 익은 고기를 싸서 한입에 넣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이다.
누군가의 앞에 있던 고기접시가 비어지기가 무섭게 다른 고기접시로 바뀌었다.
인원수대로 고기를 주문했기에 고기접시와 야채접시가 각자의 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진 후에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제야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씩씩하게 높은 산자락을 앞장서서 걷던 아이.
높은 나무 위에서 겁도없이 곧장 블루라군으로 뛰어들었던 아이.
중국에서 온 꼬마 친구가 부모님과 함께 우리 뒷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아이도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곁눈질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눈을 피하기는 했지만 웃고 있는 입꼬리를 감추지는 못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수줍어했던 그때처럼.
우리는 아이의 부모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중국에서 온 이들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했고 덕분에 파파고를 들여다보며 대화할 필요는 없었다.
난징에서 온 꼬마친구의 영어 이름은 '맥스'였다.
수줍은 얼굴과는 다르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만남 뒤에는 기어코 헤어짐이 따라온다.
세상이 정해놓은 법 같은 것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고 우리가 서로를 알아간 것은 그보다도 더 짧았지만 이 귀여운 꼬마친구와의 이별은 못내 아쉬웠다.
만남에 헤어짐이 따라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헤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만나지 않는 것뿐이지만 이 꼬마친구를 만나지 않는 편이 좋냐고 묻는다면 당연히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꼬마친구는 내게 산을 오를 힘을 주었고 모르는 사람들과 하나 되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최고의 작별인사를 해야지.
맥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맥스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맨을 자처해 주셨다.
우리의 핸드폰으로 몇 장, 또 그녀의 핸드폰으로 몇 장.
우리는 여러 장의 추억을 나누어 가졌다.
그때 맥스가 세희에게 말을 걸었다.
“What’s your name?”
세희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또박또박 이름을 말해주었다.
맥스도 그 이름을 잊어버릴 새라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따라 했다.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었다.
우리는 너를 계속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 작은 손으로 밧줄에 매달린 채 날아다니던 아기다람쥐를 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그러니 너도 늘 우리를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한국이라는 단어가 들려올 때나 라오스를 떠올릴 때, 그럴 때 스치듯 기억해 줘.
인연이라면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인연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한참을 걷다가 민아의 모자를 식당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와 민아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돌아갔다.
민아가 모자를 찾는 동안 맥스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꼭 안아주고 떠난 지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맥스는 다시 내 앞에서 씩 웃소 있었다.
나도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나와 둘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맥스는 작은 이빨을 가득 보이게 웃으며 “yes”를 외쳤다.
모자를 찾고 돌아가는 동안 세희에게 내내 자랑을 했다.
“맥스가 나한테만 이름 물어봤거든!”
“하지만 나는 맥스랑 단 둘이 사진도 찍었는 걸~”
같이 돌아가지 않은 것을 야시장으로 가는 길 내내 깊은 후회를 한 세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