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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_가장 멋진 파우치를 찾아서

I AM SEXY STRAWBERRY

by 한경환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저녁, 이제 막 불을 밝히고 있는 야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가게마다 달려있는 불빛이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번졌고,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작은 동네에서 겨우 몇 번 오갔던 거리였지만, 마치 오래전 기억 속 한 장면처럼 따듯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 수영을 즐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바꾼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막냇동생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제였다.

야시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두었는데 막냇동생이 그중 마음에 드는 파우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파우치 하나 사려고 모두가 야시장에 갈 필요는 없으니 나 혼자만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다.


“얘들아, 나 잠깐 살게 있어서 야시장 좀 다녀올게! 먼저들 가고 있어!”


“왜 혼자가! 나도 야시장 구경할래!”


그리하여 갑작스럽게도 우리의 일정에 야시장이 추가되었다.

첫날처럼 꼼꼼히는 아니었지만 오늘도 역시나 첫 가게부터 천천히 살피면서 걸었다.

나는 파우치를 파는 매장들 위주로 꼼꼼히 보았다.

모두 비슷비슷한 제품들을 팔고 있었지만 자세히 본다면 만든 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작품들이었다.

누군가는 강렬한 색상으로 눈길을 끌었고, 또 누군가는 파스텔 톤의 천으로 차분한 느낌을 풍겼다.

어제 그곳은 어디였을까.

사실 파우치는 내가 필요로 하는 제품은 아니라서 주의 깊게 보지 않았고 스치듯 찍었던 사진이라 위치까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한혜영의 취향을 단번에 명중시킨 파우치를 만들어낸 곳.

그 매장을 찾아야 했다.

조금씩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듯 걸었다.


비가 잔잔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국의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비 냄새가 기분 좋게 퍼졌다.

야시장에는 여전히 활기가 가득했다.

어린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코코넛 풀빵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행객들은 서툰 손짓으로 흥정을 하고 있었다.

열기와 소음, 음식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채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매장을 찾을 수 있었다.

오밀조밀한 글씨들과 귀여운 캐릭터들.

너무 강하지 않게 조금씩 포인트 컬러를 사용한 파우치들이 줄지어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 수많은 파우치 중 어제 그것을 찾는 일만 남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는지 어제와는 다르게 조금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모두가 보물 찾기라도 하듯 파우치 더미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파우치를 찾을 수 있었다.


‘I AM SEXY STRAWBERRY’


빨간 딸기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씩- 웃고 있는 모습.

삐뚤빼뚤한 손글씨와 어딘가 엉뚱하면서도 귀여운 표정이 이상하게 사랑스러웠다.

이걸 한눈에 어떻게 알아봤을까.

수많은 파우치 중 이것을 딱 알아보고 고른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이거 봐, 이거는 완전 민아 아냐?”


고개를 돌리자 세희가 파우치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근육질 망고스틴이 웃으며 운동하고 있는 모양의 파우치였다.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파우치를 찾아주며 웃다 보니 어느새 손에는 몇 장의 파우치가 쥐어져 있었다.

그때부터 흥정이 시작되었다.


“우리 각자 1장씩 살 건데 20000낍에서 조금 깎아주면 안 될까?”


하지만 그녀는 제법 단호했다.

겨우 4장 가지고는 안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각자 2장씩 사면 어때?”


아까의 단호한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18000낍.

우리의 서툰 흥정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파우치가 더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 사는 김에 선영이 것도 하나 챙기고 싶었다.

귀여운 핑크색 바탕의 옥수수가 그려진 파우치가 눈에 띄었다.

각자 1개씩 더 고르는 중에 민정이가 3개를 사야겠다고 했다.

미래에 생길 남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미리 커플로 사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두 개를 웃으며 들고 있는 민정이를 보고 모두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그럼 각자 3장씩 사는 게 어떠냐고 했고 나는 세희가 골라준 못된 눈을 한 키위새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걸 사기로 했다.


결국 1장의 파우치를 사기 위한 발걸음 끝에 우리는 총 12장의 파우치를 구매했다.

누군가는 과소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장 당 1000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마지막에 장당 16000낍으로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손에 쥔 파우치가 우리와 꼭 닮아있었고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해 줄 것 같았다.

야시장을 나서며 손에 든 쇼핑봉투를 흔들었다.

임무를 완수한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동생에게 자랑할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는 길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수영장에서 인생샷을 찍어야 한다는 둥,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나와 보일까 걱정이라는 둥.

그런 것을 걱정할 사람들 치고는 너무 공격적으로 먹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길 한편에 자리한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이곳에서 과일을 조금 사서 수영장에서 먹을 계획이다.

선명한 빛깔의 용과, 잘 익은 바나나들이 가판 위에 잔뜩 놓여있었다.

과일가게라 그런지 생과일주스도 함께 팔고 있었고 각자 원하는 맛을 사가려 했다.

하지만 한놈만 패는 민정이는 자신이 가던 가게에서 먹겠다며 돈을 받아갔다.

역시 뚝심 있는 그녀다.


손에 과일봉투와 주스, 그리고 파우치 쇼핑 봉투까지 한가득 들고 숙소로 향했다.

야시장의 불빛이 점점 멀어졌고, 여행의 하루가 이렇게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따뜻한 불빛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오늘을 떠올렸다.

예상에 없던 일정이었지만 이런 게 바로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우연한 순간이 작은 추억이 되고, 사소한 물건 하나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기억을 품고, 천천히 밤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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