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블루라군 3
창밖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눈꺼풀을 간질였다.
한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헤매다 천천히 눈을 떴다.
공기에 스며든 따듯한 온기가 이곳에서의 아침이 또다시 선물처럼 찾아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사실 라오스에 도착한 이후로 매일매일 기분 좋은 아침이지만 말이다.
하루하루가 모두 내가 꿈꾸고 바라던 일로 가득하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오늘의 일정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침 시간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꽤 오랫동안 그려왔던 순간을 마주하는 날이기에 아침부터 부산히 몸을 움직이는 것에도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뛰다시피 내려가 허겁지겁 조식을 입에 넣었다.
한시가 바빴지만 접시 위엔 각자 원하는 음식으로 가득했다.
서로의 픽을 바라보며 웃음이 터졌다.
한 접시로는 부족했던 우리는 다시 일어나 접시를 채워왔다.
두 번째 접시도 비웠지만 여전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조식에 있어 후식을 빼먹을 수는 없는 법.
우리는 다시 한번 일어나 과일과 빵을 집어 들고 돌아왔다.
졸린 눈을 치켜뜨고 팅팅 부은 얼굴로 식사를 하는 우리들.
어제 수영장에서 찍은 인생샷 속 인물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야?
오늘의 일정은 라오스 전체 일정 중 가장 바쁜 날이다.
9시부터 1시까지 버기카를 예약해 두었고, 루앙프라방으로 떠나는 기차도 2시 반에 예약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4시간 뒤인 다음 기차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미리 짐을 싸두고 체크아웃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체크아웃을 한 뒤에 짐을 보관해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운터를 지나던 중,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혹시 조금 늦게 체크아웃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예약한 기차가 2시 반이라서요.”
우리의 기차표를 구매해 준 직원분은 살짝 미소를 띠며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초조한 마음을 두드렸다.
이내 직원이 다시 고개를들어 웃으며 말했다.
"다행힏 다음 손님 예약이 다음 날이네요.
2시까지는 무료로 연장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수건으로 대충 닦은 후 루앙프라방에 도착해서야 샤워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동응답기처럼 땡큐라는 말을 외치며 숙소로 뛰어 올라갔다.
덕분에 짐을 싸는 일도 뒤로 미루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쳤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우리는 계획보다 이른 시간에 할리스 커피 앞에 도착했다.
전에는 근처에서 바로 버기카를 빌려 이동했지만 지금은 버기카 주차장소가 조금 먼 곳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버기카 이용시간 4시간에 따로 1시간이 추가로 더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계획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으므로 별문제 없었다.
툭툭을 타고 버기카 주차장으로 향해 가는 길,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선처럼 부푼 우리의 기대를 꺼트리기엔 역부족이었다.
20분가량 달리자 수많은 버기카들이 주차되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약한 것은 2인승 2대.
4인승을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했지만 2인승이 더 재미있어 보였다.
수많은 버기카 중 초록색과 주황색 두 대가 우리가 타게 될 차량이었다.
나와 민아는 각자 키를 건네 받고 안전사항을 들었다.
잠시 후 설렘을 가득 안은 채 버기카에 올라탔다.
엔진의 진동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드디어 출발이다.
가는 길은 단순했다.
길은 하나, 오직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길.
앞만 보고 달려갔던 청춘의 한 때와 마찬가지의 길이었다.
연습 삼아 주변을 몇 바퀴 돌아본 후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기카에는 그 어떤 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린 내리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빗방울이 따가울 정도로 피부를 때렸다.
하지만 오히려 더 크게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다.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온 힘을 다해 밟고 지나갔다.
아이같은 웃음 소리가 너나 할 것 없이 터져 나왔다.
흙탕물이 온 몸과 얼굴에 튀었지만 상관없었다.
라오스의 자연이 우리를 향해 건네는 장난스러운 인사같았다.
비가 점점 거세지자 잠시 차를 멈추고 보호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한 뒤에 다시 출발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더 이상 앞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출발했을 때 민아의 버기카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저 앞에 있을 것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우리 양 옆으로 펼쳐지는 절경에 눈이 갔다.
인위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오직 시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들.
그 작품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재미있는 부분은 자연이 만들어낸 것들이 도로 양 옆뿐만 아니라 도로 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종류의 들소들, 오리들, 거위, 닭, 강아지들과 고양이들…
수많은 생명들이 도로 위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우리가 멋대로 가져다가 사용하는 자연이 사실은 그들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이 버기카와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도로에서 그들이 나타나면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차를 세워 기다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불평하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방인은 다름 아닌 우리였으므로.
뭐가 이상한 거슬 느낀 것은 한참을 달린 후였다.
지금쯤이면 보였어야할 블루라군은 커녕 민아의 버기카조차 보이지 않았다.
초초함이 서서히 가슴을 조여왔다.
손에는 땀이 배어들었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니 데이터가 터지는 곳이 아니었다.
텅 빈 지도 화면 위에 우리의 위치를 표시하는 화살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처음 보는 마을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받은 지도에는 마을이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한 가게 앞에 버기카를 세웠다.
낯선 방문자객이 신기했는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블루라군 3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질문이 끝나고 서툰 영어를 알아들은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우리가 왔던 길 쪽을 가리켰다.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어쩐지 한참은 달린 것 같은데도 안 나오더라니.
이미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망설일 시간도 아까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버기카에 올랐다.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던 때와는 다르게 전속력으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얼마 달리지 않은 시점에서 민아의 버기카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가 오지 않자 우리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민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안도와 걱정의 흔적을 보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그저 물웅덩이를 찾다가 블루라군 3으로 빠지는 골목을 지나쳤을 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따라 달렸다.
드디어 블루라군 3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장료를 지불한 뒤에 여태껏 왔던 길 중 가장 울퉁불퉁한 길을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푸른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도착이다.
나는 한 걸음 내디디며 숨을 삼켰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시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나 변해버렸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이곳은.
빛을 잃은 청춘이 여전히 빛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여전히 푸르고 싱그러운 이곳을 보니 그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나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서운함인가, 질투인가?
어쩌면 조금은 변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은 시간의 흐름에도 아랑곳없이, 그때처럼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먹구름 드리운 하늘 아래에서도, 그런 것쯤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푸른 물빛은 한결같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