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를 만나는 곳
눈 앞에 펼쳐진 블루라군은 나의 기억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억 속 블루라군은 더 푸르고 선명했다는 것.
지금은 왠지 빛이 바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기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도착한 이때가 우기일 뿐 이곳은 여전히 블루라군이니까.
문득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꺼져버린 청춘은 그저 시기의 문제일지도.
예전의 나도, 그리고 지금의 나도 여전히 나이지 않은가.
블루라군 3을 본 다른 아이들도 연신 감탄사를 외쳤다.
라오스를 잘 모르던 이들에게 이곳을 긍정적으로 각인시켜 준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한동안은 핸드폰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그렇게 핸드폰 용량의 한 귀퉁이를 내어주고 나서야 본격적인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물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우리의 모습은 오는 길에 내린 비로 홀딱 젖어 구가 보아도 이미 물놀이를 하고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가 짐을 푸는 것과 동시에 비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너무 완벽한 타이밍이지 않은가.
날씨마저 우리를 돕고 있었다.
비 덕분인지, 이른 시간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곳에는 우리뿐이었다.
마치 우리가 이 푸른 낙원을 전세낸 것처럼.
푸른 빛 물 속에 발을 살짝 담가 보았다.
어제보다 더 차가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 몸을 던지면 금세 적응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망설임없이 그대로 블루라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온몸을 감싸 안는 블루라군의 숨 막힐 듯한 차가움도 잠시, 이내 무록의 온도가 스며들듯 익숙해졌다.
오히려 물 밖에 나와있는 편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버기카를 빌리면 무료로 함께 대여해 주는 구명조끼 덕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이곳을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었다.
물 위에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방을 감싸 안 듯 빙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과 그 위로 드리운 옅은 안개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들어오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우리들.
우리는 때때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이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2시간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세희조차도 조금씩 물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던 세희지만 이제는 제법 멀리까지 헤엄쳐 나아갔다.
블루라군 1에는 다이빙 스팟이 있었다면 이곳 블루라군 3에는 집라인이 있었다.
강 끝까지 이어진 줄을 따라 미끄러지듯 나가가는 것이다.
물론 강 건너까지 넘어갈 수는 없다.
일정 지점에서 덜컹, 멈추게 되는데 그 순간 물속으로 떨어지는 구조였다.
우리는 흥분된 몸짓으로 헤엄치며 집라인으로 향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건축물 위로 발을 올리자, 낡은 나무 가 삐걱이며 인사했다.
얼마나 오래 이곳을 지켜왔을까.
짙어진 나무색과 촘촘히 낀 이끼들이 세월의 흐름을말해주고 있었다.
눈에 익은 우스꽝스러운 안내문조차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기억 속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가장 꼭대기에 올라 누군가가 내려놓았을 긴 밧줄을 잡아당겼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반대쪽에서부터 손잡이가 끌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수동으로 작동했다.
손에 닿는나무손잡이마저도 이곳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누가 먼저 해볼래?”
민아와 민정이가 우물쭈물하며 서로 앞으로 나왔다.
어딜,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란다.
다가오는 이들을 뒤로 장난스럽게 돌아섰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힘차게 달려 점프했다.
순간적으로 허공에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줄을 따라 몸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어제 했던 집라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 위를 날아가는 것 같았으니까.
젖은 몸이 바람에 닿아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덜컹.
손잡이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놓았다.
짧은 순간, 공중에 떠있다가 이내 물속으로 풍덩, 떨어졌다.
짜릿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빛을 잃은 청춘이 잠시나마 예전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장소에서, 마치 그때 그날처럼.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민아가 힘차게 손잡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윽고 민아도 집라인을 타고 날아갔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민아 또한 이곳을 즐기고 있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민아가 떨어지자마자 손잡이가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물 위로 솟아오른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기다리던 민정이가 곧장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모습들을 멀리서 세희가 찍고 있었다.
“꺄하하하하하학!”
요상한 까마귀 소리를 내며 민정이가 뛰어내렸다.
독특한 방식이기는 해도 민정이 또한 이곳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는 세희의 차례였다.
겁이 많은 세희는 용감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것들을 처음 도전했다.
수영과 집라인, 낙하.
그 모든 순간마다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새로운 자신을 찾고, 마주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나를 통해 조금 더 성장하는 것.
몸의 성장은 언젠가 멈추지만, 내면의 성장에는 끝이 없다.
자신도 모르던 모습에 놀라던 세희는 오늘 다시 한번 새로운 자신을 만날 것이다.
모두의 응원 속에서 세희가 나무 건축물 위로 올라갔다.
드르륵, 드르륵 하며 손잡이가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잡이를 잡은 세희가 심호흡을 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무 바닥 위의 세희의 떨림이 느껴졌다.
수차례 망설이던 다리가 결국 결심한 듯 공중으로 향했다.
그 가벼운 낙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작은 첨벙 소리로 끝이 났다.
다행히도 물속에서 올라온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걸려있었다.
여행에서는 꽤 자주 낯선 나를 만나게 된다.
생각보다 빠른 순발력에 놀라기도 하고, 때론 대담한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한다.
오늘 만난 용감한 세희는 어땠을까.
사실 그 질문의 답은 필요도 없었다.
이미 얼굴 위에 그 답이 선명하게 쓰여있었다.
눈부신 웃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