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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_80살 청춘

여전히 빛이 나는

by 한경환

두려움은 허상일 뿐이라 했던가.

한 번 넘어서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 발을 떼는 순간이 어려웠을 뿐 그다음은 놀랍도록 쉬웠다.

바람을 가르며 집라인을 타고 뛰어내렸다.

허공에 몸을 맡기는 짜릿함, 물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의 차가운 충격,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해방감.

우리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웃으며 또다시 줄을 잡고 뛰어내렸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앞다투어 수영하기까지 했다.

짙푸른 물 위로 우리의 환호성과 웃음이 둥둥 떠다녔다.

민정이가 우스꽝스럽게 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다 함께 한참을 웃었다.

구름을 머금은 수면 위로 웃음을 가득 품은 채, 물을 이불 삼아 벌러덩 누웠다.

자유로움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웃음소리는 아득히도 부서졌다.

문득 나중에 이 순간을 떠올리면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또 다른 청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이란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 청춘으로 기억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흔히들 말하는 청춘은 시절은 도대체 언제라는 말인가.

혹시 매 순간이 청춘일 수도 있는 걸까.

어쩌면 청춘이라는 것은 그저 나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에 확신이 들지 않았을 때, 그녀를 만났다.


어느새 우리가 만들어내는 웃음 위에 다른 웃음소리가 포개졌다.

이곳에는 이제 우리 말고도 몇 팀이 더 있었다.

그중 한 팀은 친구들끼리 온 우리와는 달리 대가족처럼 보였다.

우리는 잠깐 의자에 앉아 쉬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남자가 있는 것을 보니 패키지여행을 온 가족들로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하는 노부부를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손자들에게 등을 내어주며 물장구를 치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발을 담그는 할머니.

꼬마들이 집라인을 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다른 가족들은 우리가 했던 것처럼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우리도 휴식을 마치고 2차전을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싸 안았지만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다.

더 빨리, 더 멀리 손을 휘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사랑하는 고요함 속에 온몸을 맡겼다.

모든 것이 조금씩 느려지고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는 곳.

물 밖은 빠르게 변하지만 물속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 방울이 몽글몽글 떠올랐고, 나는 그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 고요한 자유를 깬 것은 민아였다.


"집라인 타러 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빠지고 텅 비어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우리는 주저할 것도 없이 다시 집라인으로 향했다.

신이 났다.

이렇게 기분 좋은 설렘을 느껴본 것이 언제란 말인가.

내일 또다시 출근이라는 생각들로 잠에 들고 깨어있는 동안 주말을 기다리는 삶, 흘러가는 시간에 쫓겨 살던 나날들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흘러가는 시간들이 내 것으로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한경환으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도착해 손잡이를 당기고 있을 때 뒤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나무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단숨에 뛰어 올라온 계단을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시간을 들여 올라오고 있었다.

주황빛 구명조끼 아래 단정하게 차려입은 파란색 수영복이 눈에 띄었다.

어째서인지 손잡이를 다 끌어당기고도 출발하지 않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뒤에 도착한 할머니는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계속 바라만 보다가 돌아가기 직전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올라온 것 같았다.

나머지 일행들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에게 손잡이를 건넸다.


“레이디 퍼스트?”


다행히 할머니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잡이를 쥐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여든인데, 할 수 있을까?”


이 높이까지 올라온 그녀를 보며 안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대문자 T인 나조차도 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동자는 반신반의하는 듯했지만 곧 결심이 선듯했다.

사실 그녀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고개를 끄덕인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걱정 반, 기대 반인 눈으로 이곳의 모두가 그녀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렸다.

걱정이 가득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확신의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가락 끝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어지고 스르륵 바람을 가르며 그녀는 줄을 타고 내려갔다.


햇살 한 줌 없이도 빛이 났다.

그녀의 파란색 수영복보다도 더 푸르게 빛이 났다.

모두들 숨조차 잊은 채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물에 떨어졌을 때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수면 위로 올라온 그녀를 향해 모두 함께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물에 젖어있었지만 얼굴엔 한없이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청춘이다.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는 청춘이었다.

그녀의 청춘은 파란색 빛으로 여전히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하나가 내 의문에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매 순간이 청춘인 삶도 있을 것이다.

청춘이란 다른 이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아닌 마음의 문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청춘의 빛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꺼져버렸다고 생각한 나의 청춘이 언제든 빛을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청춘은 단 한번 화려하게 빛나고 터져버리는 폭죽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구름만 걷힌다면 언제든 빛을 낼 수 있는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 이곳을 떠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청춘이, 어쩐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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