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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_기차를 타고

루앙 프라방으로 가는 길

by 한경환

택시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 위를 15분쯤 달렸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보는 풍경은 넋을 놓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숲이 길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졌고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나직이 속삭였다.

길가엔 거친 돌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의 나무들과 이름 모를 풀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원시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듯한 풍경.

자연의 손길만이 허락된 그곳은 식물을 사랑하는 나에게 더없이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풍경에 넋을 놓고 있을 새도 없이, 택시는 거대한 기차역 앞에 멈춰 섰다.

창밖 풍경은 여전히 초록으로 가득했지만 그 한가운데 우뚝 선 역사는 마치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했다.

커다란 한자가 선명하게 박힌 기차역은 지금까지 본 어떤 라오스의 건물과도 달랐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반듯해서 오히려 주변의 자연이 더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기차역을 만든 것은 라오스가 아닌 중국이었다.

그래서인지 라오스에서 만난 건축물과는 사뭇 다른 스캐일이었다.

아주 작은 시골의 기차역 정도를 생각한 터라 이곳의 엄청난 규모를 보고 적잖아 당황했다.

택시에서 내려 다가갈수록 그 규모가 실감이 났다.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역 입구에는 공항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승객들은 차례로 줄을 서서 소지품 검사를 받고 있었다.

우리도 그 줄 뒤에서 캐리어를 포함한 모든 짐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렸다.

기계가 소지품을 훑어보는 동안 직원들이 금속 탐지기를 이용해 우리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검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 직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시선이 내 짐에 머물렀다.


'혹시 뭐 잘못 가져온 게 있나?'


순간 머릿속이 바빠졌다.

하지만 문제 될 만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차분히 캐리어를 열어 보였다.


“You can’t bring this in.”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손에는 나의 썬스프레이가 들려있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직원은 미안한 눈빛으로 스프레이류는 가지고 탈 수 없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기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내 실수였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스프레이들이 잔뜩 쌓여있는 그곳에 버리기로 했다.

그전에 오늘치는 써야지.

나는 마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활용해야 한다는 듯이, 옆으로 다가온 민아와 민정이에게 스프레이를 아낌없이 뿌렸다.

그다음엔 내 팔과 다리,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세희에게까지.

우리는 웃으며 스프레이를 뿌려댔다.

마음껏 쓰고 난 스프레이를 마침내 통 안에 던져 넣었을 때, 이미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검색대에 있던 직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만큼 번지기 쉬운 표정이 또 있을까.

웃음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번져나갔고 어느새 주변 모든 이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사뭇 진지하고 차가웠던 공간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순간이었다.


역사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컸다.

천장이 높고 거대한 전광판이 빛나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대합실과 카페까지.

우리는 기차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음료 한 잔씩을 사기로 했다.

비엔티안에서 자주 보이던 카페 '아마존'이었다.

베트남의 콩카페 같은 존재일까.

바리스타는 마치 이곳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듯, 느긋한 속도로 음료를 만들었다.

우리도 느긋하게 음료를 받아 들고,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이곳의 공기처럼 천천히 흘렀다.


드디어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티켓에는 칸의 호수와 자리, 도착 시간까지 상세하게 나와있었다.

바닥에 쓰여있는 위치에서 탑승하니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차의 좌석은 통로를 중심으로 3 좌석과 2 좌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자 나눠 받은 티켓 자리에 앉아보니 세희가 따로 떨어져 앉게 되었다.

그래도 한 줄로 나란히 앉아서 가는 거라 조금은 다행이었다.

기차는 예정된 시간에 조용히 출발했다.

기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한 기차는 제법 빠르게 달렸다.

창밖의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펼쳐지는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며 아늑했다.

이따금 작은 마을들과 그들의 삶인 논과 밭도 볼 수 있었다.

루앙프라방으로 가고 있다.

5년 전에는 아쉬움만 남았던 곳.

그때도 역시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고 아쉬움을 품은 채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늘 다음을 만든다.

지난번의 아쉬움이 이번 여행에서 우리를 루앙프라방으로 이끌어 준 것처럼.

그러니 아쉬움이 남을 때마다 너무 속상해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아쉬움은 늘 다음 기회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달리는 기차는 꽤 자주 터널에 들어섰다.

조용하게, 그리고 일정하게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터널의 어둠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우리를 잠들게 하기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둘씩 앞의 테이블에 엎드려 잠에 빠졌다.

나 또한 음료를 조금 옆으로 미뤄놓고 넓어진 자리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잠에 들었다.


민정이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기차는 루앙프라방 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잠에 들었던 사람들도 차례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도 먹던 음료를 정리하고 충전 중이던 배터리를 뽑았다.

의자 밑에 콘센트가 있어 오는 동안 충전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기 때문에 핸드폰 배터리가 조금 걱정이던 차에 다행인 일이었다.

기차가 멈춰 섰고 선반 위의 캐리어를 내렸다.

저마다 캐리어나 가방을 하나씩 쥐고 줄을 맞춰 천천히 입구로 향했다.

가까운 입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기차를 내렸다.

나의 두 발이 루앙프라방을 딛고 섰다.


라오스에 처음 발을 디뎠던 순간처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곳의 공기를, 이곳의 온도를, 이곳의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듯이.

달달한 루앙프라방의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마치 몸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안녕, 루앙 프라방.“


속삭이듯 내뱉은 말이 바람에 실려 퍼져 나가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바람이 내 볼을 어루만졌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루앙 프라방이 좀 더 가까이에 느껴졌다.

루앙 프라방의 공기는 향긋했고 방비엥보다는 온도가 높았다.

하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이곳은 바람이 계속 선선하게 불어왔기 때문이다.

가장 앞에서부터 한 사람도, 한 공간도 빠짐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다가왔다.

바람의 도시, 바람도 쉬어가는 곳. 루앙 프라방.

나를 감싸는 공기가 이곳이 루앙프라방임을 온몸으로 일깨워 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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