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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_아쉬움이 다음을 만든다

안녕, 방비엥

by 한경환

블루라군 3에서의 물놀이는 우리의 든든했던 아침식사를 무(無)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처음부터 텅 비어있던 것처럼 우리의 배에서는 서로 다른 음의 꼬르륵 소리가 조용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아,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식당이 있다.

식당은 이곳의 일부분인 것처럼 우리가 물놀이를 한 곳의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에메랄드 빛 블루라군이 찰랑이는 곳을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니.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상향을 그린다면, 아마도 이곳을 닮지 않았을까.

더욱이 이 식당에는 한국식 라면이 있었다.

무려 김치와 함께!

아, 김치라니.

그 익숙한 매운맛이 간절했던 참이었다.

이곳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맛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느껴졌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김치였다.


우리는 물을 뚝뚝 떨어지는 몸을 말릴 새도 없이 서둘러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메뉴판 앞에서 잠깐의 고민 끝에 라면 두 개와 볶음밥 두 개를 주문했다.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방긋 웃으며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머리를 헝클이며 젖은 물기를 털어 말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우리는 잠시 여기가 한국인지 라오스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라면이 뚝배기에 담겨서 나왔기 때문이다.

뚝배기 속 라면은 보글보글 끓으며 김을 뿜어냈다.

차가운 물에서 나와 아직도 싸늘한 피부가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얼어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짜릿함.

이 순간, 단 하나의 음식만 고를 수 있다 해도 나는 서슴없이 이 라면을 택할 것이다.


곧이어 볶음밥도 나왔다.

조금 싱거운 느낌이 있었지만 오히려 라면과 먹기 딱 좋았다.

뚝배기에 담긴 라면과 볶음밥, 그리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절경.

인스타 속 누군가가 어디를 갔다 한들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원 없이 즐긴 물놀이였음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건기였다면 더 짙고 선명한 푸른빛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 위에 아쉬움이 겹쳐졌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아쉬움이 남지 않는 여행은 없다.

그러니 지금의 감정도 당연한 것이겠지.

괜찮다.

지금 남은 이 아쉬움이 우리에게 또 다른 다음을 만들어 줄 거니까.

“여기서 하루종일 노는 걸로 계획을 짤걸 그랬어!”


민아의 말이었다.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입에서도 아쉬움이 터져 나왔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곳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니, 참 다행이었다.

출발하기 전, 나는 이곳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바위산, 나무로 만든 건축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집라인 손잡이, 우리가 앉아있던 의자까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부디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기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곳만큼은 영원히 시간이 멈춰있기를.


마지막으로 버기카에 올라탔다.

시동을 켜자 낮고 묵직한 엔진음이 손끝을 타고 온몸에 잔잔한 떨림을 전해왔다.

민아가 먼저 빠져나가고 내가 뒤 따라 나왔다.

점점 더 멀어지는 블루라군이 언 듯 보였다.

그 풍경이 조금씩 사라질수록 내 안의 아쉬움이 더욱 선명해졌다.


덜컹이는 길을 따라 버기카가 나아갔다.

이윽고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에 도착했다.

아쉬웠다.

옆자리에 앉은 세희의 눈에도 아쉬움이 가득 비쳤다.

우린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로 위를 달렸다.

포장도로는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다시 울퉁불퉁한 길,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이 길이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편안함 뒤에는 언제나 거친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길을 더 신나게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잔뜩 젖어있는 채였고 핸드폰에도 아직 방수케이스가 끼워져 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물건은 방수가방에 담겨 크렁크에 실려있었고.

그러니 더러워지는 걸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민아의 차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전속력으로 웅덩이 위를 지나쳤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덜컹이며 우리에게 흙탕물을 뿌렸다.

버기카에는 창문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린 몸이며 머리며 할 것 없이 흙탕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흙탕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며 다음 웅덩이를 찾았다.

언제 또 이렇게 흙탕물을 맞으며 운전할 수 있을까.

언제 또 이렇게 흙탕물을 뒤집어쓴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웅덩이마다 바퀴를 빠트렸다.

흙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데도 웃음이 났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또 하나 늘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순간, 흙탕물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자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기카에서 내린 우리를 본 민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우리는 지금 거지꼴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는 길이 너무 짧아서 아쉽기만 했다.

흙탕물이 우리를 온통 뒤덮었어도, 우리의 마음까지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기카를 반납한 뒤에 기다리고 있던 툭툭에 올랐다.

아쉬움과 설렘이 동시에 올라왔다.

방비엥을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루앙프라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그곳에서는 어떤 추억을 쌓을까.

물놀이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흔들리는 툭툭 위에서 하나둘 눈을 감았다.


툭툭은 우리가 출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호텔 앞에서 멈춰 섰다.

숙소로 들어온 우리는 순서를 정해 샤워를 했다.

분명 오는 길에 몸이 다 말라버려서 흙이 다 털렸을 줄 알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따라 흙탕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조금 전의 버기카를 타고 달리던 순간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몸에 잔뜩 끼어있던 흙탕물은 하수도를 따라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온전히 남았다.

오히려 더 깊게 새겨진 듯했다.

여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또 다른 어딘가에, 우리의 청춘을 새겨나갈 것이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짐을 챙겨 나왔다.

내려오니 이미 호텔 측에서 불러준 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표를 건네받은 뒤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는 별 것 아니라고 말했지만 우리에게는 큰 일이었다.

출발 전부터, 그리고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 이 티켓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에 또 라오스에 오게 된다면 다시 보자며 인사를 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 다짐했다.

우리의 짐이 트렁크에 실리고 택시는 조용히 출발했다.

나의 어린 청춘이 있던 곳, 그리고 새로운 청춘을 남긴 곳.

방비엥을 떠날 시간이다.

여전히 소중한 이곳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 될 수 있을까.

스쳐가는 방비엥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되뇌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에게 이곳이 그러하듯 의미 있는 곳으로 남기를.

그래서 언젠가 빛을 잃어버린 청춘을 마주한 순간에 돌아와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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