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_이름부터 예쁜 루앙 프라방

처음 뵙겠습니다.

by 한경환

4개의 캐리어가 덜컹덜컹, 같은 소리를 내며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루앙 프라방의 첫인상은 고요였다.

기차가 떠난 뒤 그 여운이 공기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고요한 이 공간을 바람만이 유유히 헤엄쳤다.

바람결이 살짝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나선 공기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기차의 뒤쪽에 앉았던 우리가 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툭툭들이 한차례 손님들을 태운 뒤 흩어지고 난 뒤였다.

어디선가 떠난 사람들이 남긴 잔열이 바닥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우리가 서있는 위치에서는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 것 같기에 화장실에 가는 겸 밖에서 택시를 잡아보기로 했다.

어플을 켜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한 사람이 내게 걸어왔다.


“where are you going?”


고개를 들자 짧은 반바지에 그보다 훨씬 더 짧은 상의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낡은 트럭 한 대가 보였다.

툭툭이었다.

방금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가려는 참일까?

그는 이미 우리가 타게 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어코 듣고 말겠다는 의지의 웃음을 보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우리의 숙소 위치를 보여주니 어딘지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관심 없다는 눈빛으로 흘리듯 슬쩍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가 번뜩이는 눈으로 핸드폰 계산기에 가격을 적어 보여주었다.

우리가 부르려는 택시 값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여행하다 보면 때때로 처음 보여주는 가격이 내릴 때는 인당 가격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4명 가격이 맞는지 재차 확인을 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 물어본 거라 여겼는지 알겠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더 낮은 금액을 적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우리는 4개의 캐리어가 실린 툭툭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택시를 부르겠다며 나가서는 툭툭을 끌고 온 것이 재밌었는지 민정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게 더 싼데 어쩌겠어,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툭툭이 덜컹거리며 출발하자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낯선 땅의 바람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감촉이었다.

마치 오래전 어디선가 스쳤던 바람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트럭 양 옆에 나란히 앉아 목적지로 향하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따라 움직이는 캐리어들을 돌아가며 붙잡았다.

이마저도 재미있는지 세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툭툭이란 트럭의 양쪽 사이드에 의자를 붙여놓은 것뿐이다.

사방이 뻥 뚫려있는 덕에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머리를 헝클였고 흘렸던 땀방울들을 빠르게 식혀주었다.

땀을 닦을 필요도 없이 바람이 스치며 흔적을 지워주었다.

땀이 식고 나니 이제야 시야가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울퉁불퉁한 절벽 사이로 나무들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작은 새들이 날아다녔고 푸르른 풀잎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길가에는 소 몇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길가의 강아지가 찬찬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 루앙 프라방의 풍경은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평화롭고 또 조화롭다.

인간이 자연을 밀어내고 터전을 만들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자리 잡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하모니는 그 어떤 노래보다 감미로웠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셔터음이 멈추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사진을 찍던 민정이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우와, 여기 진짜 이쁘다!”

“야, 루앙프라방! 이름부터 너무 예쁘잖아!”


세희의 말이었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맞다.

루앙 프라방.

어쩜 이름마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라오스의 옛 수도이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곳.

5년 전에도 와보고 싶었지만 포기해야 했던 곳.

그때 느꼈던 아쉬움이 오늘을 만들어냈다.

얼굴에 느껴지는 바람이 왠지 잘 왔다고,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 스친 바람은 아닐 테지만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름부터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다운 곳.


조금씩 집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신호등이 이제 시내에 도착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아이가 먼저 나를 보고 웃었다.

웃음.

이 얼마나 강력한 언어인가.

그 어떤 말보다 빠르게 전해지고, 전염병처럼 퍼지지만 무섭지 않다.

옮으면 옮을수록 세상이 빛이 나니까.

함께 웃으며 손을 흔들자 까르르 웃는다.

아이들은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한다.

가끔 찡그리고 자주 웃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모습이면서 동시에 배워야 할 모습일 것이다.

저 걱정 없는 웃음이, 발그레한 볼에 묻은 순수가 오래도록 머물기를.


점점 더 건물들과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느새 우리는 루앙 프라방의 중심지를 지나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건물과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바람 속에 음식 냄새, 사람들의 말소리, 익숙해질 것만 같은 온기가 섞여 있었다.

사람냄새.

어서 이곳의 공기를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루앙 프라방의 땅을 두 발로 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그들의 삶을 읽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한 줄이 되고 싶었다.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툭툭은 속도를 줄였다.

우리가 멈춰 선 곳은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다.

크게 우거진 나무 밑에 자리 잡은 출입문이 썩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이름 모를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나무를 지나 삐걱거리는 출입문을 열었다.

오래된 이곳은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낡은 벽돌이 층층이 쌓아져 있는 담과 나무로 된 테이블들은 저마다의 시간으로 바래있었고 바닥의 돌틈 사이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오래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이 맴도는 곳이었다.


비워져 있는 카운터의 앞을 서성이다가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시간마저 느리게 흘렀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시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행.

오직 라오스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계단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이곳에서 키우는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마저 이곳의 여유를 닮아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것이 이곳을 닮아있는 것 같았다.

계단에 늘어지듯 자고 있는 강아지, 낡은 테이블에 줄지어 걸어가는 개미들, 바람에 맞춰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잎.

흔한 풍경들이 루앙 프라방을 만나 느긋한 향기를 풍겼다.

아, 비로소 루앙 프라방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keyword
이전 25화24_기차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