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쉬어가는 곳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왔다.
하루를 달래듯 부드럽게 스며드는 바람.
그 흐름을 따라 서서히 저녁으로 넘어갔다.
바람이 저녁을 데려온 것처럼.
어디선가 불어와 내게 닿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체온과 이야기를 스쳤을 바람이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온 그들의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속삭이듯 지나간 바람이었지만 언젠가는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겠지.
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야시장이 시작되었다.
낮동안 조용히 숨을 고르던 거리가 천천히 깨어났다.
늘어선 가게마다 하나둘 불이 켜졌다.
드디어 전기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둠을 기다렸다는 듯 환히 빛을 밝히는 가게들, 낮의 느릿한 공기가 온전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누워서 쉬던 거리가 이제야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길게 늘어져있는 길 전체가 하나의 야시장이었다.
모든 삶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익숙한 몸짓으로 수레를 열고, 오늘 판매할 물건들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그 작은 수레는 마치 헤르미온느의 마법 주머니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들을 토해냈다.
저토록 많은 물건들이 저 수레 하나에서 다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나하나 손때 묻은 물건들.
분명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성스레 만들어낸 것들이리라.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오가는 대화들이 함께 엮어졌을 것이다.
바꿔 끼는 실 하나마다 그들의 목소리가 담겨있을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다.
사람들의 하루가 녹아 있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있는 작은 우주였다.
우리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모든 가게들을 살펴보았다.
방비엥에서 본 것과 비슷한 물건들도 있었고 전혀 새로운 물건들도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붙들렸다.
흥정하는 목소리, 옷을 고르는 손길, 꼬치를 들고 웃는 얼굴들.
그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풍경처럼 어우러졌다.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나의 모습도 루앙 프라방의 풍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루앙프라방의 저녁 중 한 장면으로 남겠지.
수많은 물건들, 끝없이 이어지는 가게들.
하지만 아무리 흥미로운 볼거리들도 허기짐 앞에서는 집중력을 잃기 마련이다.
야시장의 가장 강력한 유혹은 따로 있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
다름 아닌 바람을 타고 퍼지는 음식 냄새였다.
이 거리의 공기마저 짭조름했다.
허기짐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다른 아이들의 상태도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쇼핑에서 식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루앙 프라방의 야시장은 거리 곳곳에서도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아예 푸드코트처럼 여러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로는 수십 개의 테이블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걸음을 뗄 때마다 코끝에 새로운 냄새가 맴돌았다.
음식의 종류가 너무 많았으므로 결국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원하는 음식을 사서 만나기로 했다.
나와 세희는 먼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가게마다 팔고 있는 음식들이 너무 달랐기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천천히 음식들을 구경하며 돌다가 유독 사람이 많은 집은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누군가가 던져주는 음식이나 바닥에 흘린 음식을 먹기 위해 어슬렁 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쫓던 시선이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매장 앞에서 멈추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가게 앞으로 다가가자 뜨끈한 국수를 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 종류의 토핑으로 채워진 접시들이 육수가 부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연결동작인 것처럼 함께 줄 맨 뒤에 섰다.
주문을 넣으면 채를 이용해 면을 삶아 육수를 부어주는 방식이었다.
우리의 차례는 금방 다가왔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다 별이 붙어있는 국수 2개를 주문했다.
면을 삶아 뜨거운 육수를 붓는 동작이 능숙하고 경쾌했다.
뜨거운 물에서 면이 한 번 건져질 때마다 그에 맞춰 침이 꼴깍 넘어갔다.
국수 두 접시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골라두었던 자리로 돌아왔다.
풍기는 냄새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지만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돌아온 민아와 민정이는 우리보다 조금 더 큰 접시와 만두를 들고 있었다.
접시 안에는 간장에 조린 고기가 접시 가득 들어있는 국수가 담겨 있었다.
각기 다른 색의 국물이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식욕을 자극했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접시들이 어서 나를 먹어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젓가락을 뜯기가 무섭게 접시들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수한 국물과 깔끔한 국물, 살짝 매콤한 국물까지.
서로 다른 맛의 국물들이 입안에서 춤을 췄다.
생소한 향신료의 향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음식들로 배를 채우는 것.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일 것이다.
미각과 후각, 모든 감각들이 새로움에 눈뜨고 있었다.
익숙한 듯 다른 느낌의 만두까지 더해지니 완벽한 한 상 이었다.
배를 이미 든든하게 채웠지만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다시 두 팀으로 나누어져 흩어졌다.
우리는 아까 봐두었던 로띠를 사기 위해, 민아와 민정이는 입구에서 보았던 빙수를 사기 위해.
로띠의 줄은 우리가 아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길어져 있었다.
다들 식사를 끝낸 뒤 후식을 사기 위해 이곳에 모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요리사들은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반죽을 펼치고 기름에 익힌 뒤 손놀림 졸게 접어 올렸다.
뜨거운 불판 앞에서도 손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부지런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빠르게 로띠 2개를 주문한 뒤 우리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불판의 뜨거운 열기에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더운 날씨에 하루종일 뜨거운 불판 앞에서 종일 로띠를 만들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선풍기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반대쪽을 향하게 돌렸다.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로띠를 뒤집던 손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리번 거리던 눈이 나의 손에 들려있는 선풍기를 보고서는 곧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그래, 좋든 싫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서로에게 스치는 바람처럼, 우리는 함께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이왕에 주고받을 것이라면 그것이 웃음인 편이 좋지 않을까.
세희와 나는 우리의 로띠가 완성될 때까지 거꾸로 향한 선풍기를 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로띠 2개가 나왔을 때 우리는 서로 땡큐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자리를 찾아가니 이미 민아와 민정이는 먼저 빙수를 받아 앉아 있었다.
빙수는 조금 녹아 있었지만 동남아의 더위 속에서는 그마저도 반가웠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우리는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웃음이 피어났다.
테이블마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저녁시간이 이어졌다.
저마다 다른 웃음이 터져 나왔고 다른 언어로 서로를 쓰다듬었다.
옆자리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들의 손주들과 함께 마주 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그득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 작은 아이들은 사랑을 가득 먹고 쑥쑥 자라날 것이다.
루앙 프라방의 저녁은 평화롭다.
조곤조곤한 웃음이 가득하고 바쁜 사람 하나 없이 여유가 넘친다.
뛰기보다는 걷고 가끔은 멈춰 서서 시간의 냄새를 맡는다.
이곳은 바람이 쉬어가고 시간마저 하품을 하는 곳.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은 사랑이 땀을 식혀준다.
이곳의 저녁은 그렇게, 바람을 타고 기억 속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