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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_안주가 된 추억

좋은 추억이 맛도 좋다

by 한경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다 든든하니 발걸음도 여유로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가 없었다.

루앙프라방의 밤은 야시장과 함께 시작되니까.

가게들이 한 줄로 늘어선 거리는 마치 유혹하듯 반짝였다.

가지런하게 물건들을 늘어트린 상인들은 저마다 손짓했다.

가장 입구에서 가까운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씩 차례로 구경할 심산이었다.

정성스럽게 자수를 넣은 파우치, 라탄으로 만든 가방,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 종이를 오려 만든 풍등.

손길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들이 거리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곳의 모든 매장 앞에 멈춰 서서 손끝으로 물건들을 매만지며 오래도록 머물 것 같았다.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여행 내내 같은 향수를 뿌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마그넷을 모은다.

물론 나 또한 마그넷을 모으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티셔츠였다.

여행한 나라가 새겨져 있는 반팔티를 모으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었다.

조금은 생소한 수집일 수 있겠지만 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행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가 그 옷을 입을 때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냄새, 사람들, 쌓여있는 옷 중에 이 옷을 집어 들었을 때로.

옷장 속에서 무심코 그 옷을 꺼내 입을 때면 다시 그날의 햇살 아래에 거 있는 것만 같았다.

루앙 프라방의 야시장에는 옷을 파는 매장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부르는 가격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저렴한 가격을 찾아보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하나하나 발품을 팔며 가격을 물었다.


잠시 후, 나뿐만이 아닌 우리 넷 모두 티셔츠 한 두장씩 들어있는 봉투를 각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의 물음에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대답했던 꼬마사장님이 있는 가게 앞에서였다.

꼬마사장님은 2장을 고르고 3번째 티셔츠를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내게 3장을 사면 더 싸게 해 주겠다며 살살 꼬셨다.

심지어는 다른 집보다도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나는 알겠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에 곧장 민아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여기 야시장 최저가 반팔티를 찾아냈다고 말이다.

최저가의 소식은 바람을 타고 민정이와 세희에게도 전해진 것 같았다.

우리는 커다란 천 더미를 손으로 뒤적이며 원하는 디자인을 찾아냈다.

손끝에 닿는 얇은 면 티셔츠의 감촉, 어딘가에서 섞여 오는 향신료 냄새, 흥정을 주고받는 상인들과 여행자들의 목소리까지.

이곳의 공기 자체가 하나의 기념품 같았다.

아쉽게도 루앙 프라방이 쓰여있는 반팔티는 없었다.

대신 루앙 프라방에서 많이들 이용하는 자전거가 크게 그려진 티셔츠를 골랐다.

자전거 위에 적힌 꼬불꼬불한 라오스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알 수 없는 글자들이었지만 오늘의 공기와 온도를 품은 암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오늘을 떠올릴 것이다.

야시장의 물건들로 가득 채운 얇은 봉투를 들고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이제 거리에는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어둠은 루앙 프라방을 더 밝게 빛나게 했다.

노란 등이 반짝이는 매장 앞에서 물고기키링을 고르다 문득 민정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혼자 사라진 민정이를 찾으러 매장을 돌고 있었다.

우리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탈색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직접 만든 인형들과 머리끈 등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민정이 앞에 놓인 트레이에는 작은 코끼리들이 가득했다.


"이거 다 사는 거야?"


내 물음에 민정이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흥정까지 끝낸 상태였다.

야무진 솜씨로 묵묵히 5마리의 코끼리를 골라 담더니 결제를 마쳤다.

하지만 민정이의 쇼핑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미 눈여겨본 다음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다리를 옮겼다.

민정이의 질주는 종이로 만든 예쁜 조명을 사고서야 끝이 났다.

민정이의 쇼핑이 끝남과 동시에 야시장도 점점 문을 닫고 있었다.

상인들은 어디선가 가지고 온 작은 수레에 차곡차곡 가져온 물건들을 다시 담고 있었다.

그들의 하루가 끝이 나고 있었다.

오늘 주인을 만나지 못한 물건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수레 안으로 돌아갔다.

상인들은 물건을 조심스럽게 포개고, 저마다의 하루를 가볍게 접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엄마 옆을 꼭 붙어가는 소녀를 보았다.

무겁게 끌고 온 수레가 갈 때는 한없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그러한 하루들이 매일매일 반복되기를.


다시 고요를 되찾은 루앙 프라방의 거리를 걸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거리를 밝히는 등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해가 떠있던 시간의 거리와 달이 떠있는 시간의 거리는 제법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어둠이 내려앉자 낮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냈다.

오래된 돌담의 금이 간 흔적,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등불, 달빛에 반짝이는 강물.

루앙프라방은 밤이 되어서야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올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가던 길을 멈춰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아졌다.

숙소 근처에 도착했지만 이대로 들어가기엔 조금 아쉬웠다.

가볍게 맥주가 어떠냐는 말에 다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가기보다는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더 많은 루앙 프라방을 눈에 담고 싶어서였을 수도, 조금 더 이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은 고요보다는 적막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리 대신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 나뭇잎이 굴러가는 소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에 우리의 이야기 소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민정이는 골라온 코끼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미 10번쯤 더 보여준 코끼리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몇 개 더 살걸 그랬어..”


아쉬워하는 민정이에 웃음이 나왔다.

계속 걷다 보니 아주 작고 허름한 가게가 나왔다.

사실 지도를 보지 않았더라면 거기가 슈퍼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안에서 보이는 펩시가 쓰인 냉장고를 보고서야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내부는 어릴 적 갔던 허름한 문방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읽을 수도 없는 글자들이 가득한 과자들이 줄지어 서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맛있는 과자 판별기’가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정이는 읽을 수도 없는 글자들을 뚫어지게 보더니 앞면과 뒷면까지 신중하게 살펴본 후 몇 개를 골라왔다.

그다음은 맥주였다.

세희가 찾아온 정보에 의하면 이곳 루앙 프라방에서만 살 수 있는 루앙 프라방 맥주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라오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라오비어뿐이었다.

어느새 우리 옆으로 다가온 주인할머니께 여쭤봤지만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우리의 말이 잘 전달되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라오비어 4개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다.


새로 산 옷들과 라오비어 4개를 들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꽤 가벼웠다.

우리는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온통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가득 채울 만큼.

도착한 숙소의 불빛 아래에는 여전히 도마뱀이 지나가고 있었다.

동남아에서는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 한다.

이들의 공간에 우리가 온 것이니.

숙소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가 흘렸던 땀을 말려주었다.

우리는 순서대로 샤워를 한 뒤 가장 큰 침대 아래로 모였다.

대학생 시절, 우리는 자주 이렇게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간식거리를 먹곤 했었다.

책상 위에는 항상 잡다한 것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4년이나 지났지만 다시 이렇게 앉으니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리고, 불안하고, 흔들리며, 그럼에도 빛이 났던 그때로.


그 시절을 떠올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우리로 돌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삶도 변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때의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딘가에 숨어있던 기억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서로 고개를 들었다.

과자가 다 떨어졌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맛있는 기억들이 우리에게는 잔뜩 있었으니까.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맥주 한 캔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깊어지는 이야기와 함께 쏟아지는 청춘에 취했다.

다시금 청춘의 언저리에 들어온 것 같았다.

청춘이라는 것은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청춘은 특정한 나이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했던 시간들을 공유하며 붉은색 청춘보다 더 붉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는 것.

이것 또한 청춘의 한 형태일 것이다.

요란한 청춘의 달이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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