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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_어두운 환영인사

어두워도 보이는 것

by 한경환

여유로운 미소를 가진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주방으로 보이는 아래층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한 손에는 낡은 공책을 들고 있었다. 자신을 “닉”이라고 소개한 뒤 나의 이름을 묻더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페이지들을 차례로 넘겼다.

한 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기더니 조심스럽게 한 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어낸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나는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다시금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캐리어 두 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나머지를 들고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우리의 방은 카운터에서 한 층만 올라오면 되는 곳이었다.

번호키나 자동으로 잠기는 센서가 아닌 열쇠로 열고 닫는 오래된 집이었다.

열쇠를 꽂아 돌리자 나무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으로 부서지듯 스며든 햇살이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컨디션이었다.

넓고 깔끔한 숙소,

천장에 걸린 선풍기, 그리고 벽 모서리에 도마뱀 한 마리가 기어간다.


‘음, 적어도 바퀴벌레는 없겠군.’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어쩌면 여행이란 결국 주어지는 상황을 유연하게 적응하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점점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려는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천장에 매달려있는 선풍기를 작동시켰다.

먼지가 잔뜩 쌓여있었지만 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다.

에어컨까지 켜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가방을 풀고 보조베터라를 연결하고, 핸드폰을 충전했다.

그러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가방 속에서 비닐로 싸두었던 젖은 옷들을 꺼내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로 나가자 뜨거운 햇살과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나무로 된 난간 위, 처마 밑의 공간, 테이블 위까지.

비어있는 공간이란 공간에는 모두 수영복과 옷들을 널어두었다.

뜨거운 태양과 바람이 금방 뽀송뽀송하게 말려줄 것이다.

바람이 살랑이는 소리가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러나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문제가 생겼다.

문을 열자마자 무겁고 후끈한 공기가 밀려왔다.

창문을 닫아둔 채였는데도 바깥과 다를 바 없는 후끈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선풍기는 멈춰 서 있었고, 에어컨의 전원 버튼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땀 한 방울이 천천히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1층으로 내려가자 닉이 아까의 여유로운 미소로 나를 맞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했고 그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 가끔 이래.”


에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멍해졌다.

언제 다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음… 아마 오늘 안에. 내일이나?”


내일이나?

그렇다면 하루, 어쩌면 내일까지도 전기를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비가 올 때 가끔 정전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런 일은 읽은 적이 없었다.

2년 전 베트남 여행의 악몽이 떠올랐다.

태풍으로 정전이 된 채 캄캄한 방 안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아껴가며 지내던 밤.

그때의 불안감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나같이 불이 꺼져있는 채였다.

그것은 음식점도 마찬가지였다.

슈퍼마켓처럼 보이는 곳의 냉장고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이 근방의 모든 곳이 정전인 것 같았다.

음식점을 앞을 지나다 한 꼬마를 만났다.

핑크색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안에는 아이의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이 앉아있는 사람들.

집 안을 밝혀줄 전기도 없이 어둡게 앉아있는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들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들의 눈엔 걱정이 없다.

걱정 대신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동정은 그저 가엾은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숙소는 여전히 더웠고 닉은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묘하게 전염성이 있었다.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순박한 웃음이었다.

챙겨 온 무선선풍기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날이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우리의 숙소는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메인거리로 가려면 10분 정도 걸어 나가야 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되었다.

위쪽이던 아래쪽이던 결국에는 중심지에 닿을 테니까.

걷다 보면 결국에는 어디든 도착한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디로든 걷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곳이 우리가 원하는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사원이 하나 보였다.

라오스에서는 불교가 삶 그 자체처럼 존재한다.

사원은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사를 위한 작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고 누군가 다녀갔는지 향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엇을 빌었을까.

저 조각상은 하루에 몇 명의 소원을 들어줄까.

너무 많은 이들이 다녀가서 누구의 소원인지 까먹으면 어쩌지.


오고 가는 길에 늘 있는 조각상에는 친밀감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가 삶인 이들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다가올 테지.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늘 자리를 지키는 친구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가장 어두운 곳에 감추어둔 마음을 꺼내 속삭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이웃이자 어떤 이의 친구일 조각상들을 지나며 나도 속으로 소원을 빌어본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조금씩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늘어갔고 그에 따라 내리쬐는 햇볕도 잦아들었다.

뜨겁던 공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쪽이 늘어나면 다른 한쪽이 줄어드는 것.

자연은 언제나 균형을 맞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루앙 프라방의 중심지.

야시장이 들어서는 거리이다.

벌써부터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었다.


문득 몇 년 전 러시아에서 방문했던 어느 거리 풍경이 떠올랐다.

유럽풍 건물들과 동남아 특유의 활기찬 야시장.

두 세계가 공존하는 듯한 풍경.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빛과 소리와 온도를 온전히 느껴 보았다.

루앙프라방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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