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에서 찾아낸 것
“어떤 게 더 나아? "
지칠 정도로 들은 질문이다.
수영장에 가자고 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수영장 입구는커녕 아직 숙소를 벗어나는 것도 하지 못했다.
고작 코앞에 있는 숙소에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져온 수영복을 모두 꺼내놓고 고를 줄이야.
그리고 그 고민을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주고 있는 친구들.
물놀이용 반바지와 돌아다닐 때 입는 반바지 딱 두 종류를 챙겨 온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떤 것은 블루라군 3에 가서 입을 거, 또 어떤 것은 비엔티안 숙소로 가서 입을 거…
각기 다른 순간마다 각기 다른 수영복을 입어야 한단다.
한참의 고민 끝에 각자 수영복을 골라 들었다.
드디어 수영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수영장 마감시간이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인생샷을 찍기가 이어졌다.
돌아가며 앞에 세워둔 채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해외에서는 셔터음이 나지 않아서 망정이지 소리가 났다면 아마 수영장에서 기자회견이라도 열린 줄 알았을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기자회견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드디어 자유수영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이 호텔의 수영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수심이었다.
출발지점은 허리까지 오는 깊이지만 맨 끝까지 간다면 2m의 깊은 수심이 나온다.
물속에서 똑바로 서도 손끝만 간신히 나온다는 뜻이다.
짧지 않은 거리의 수영장을 왔다 갔다 하며 자유롭게 물놀이를 즐겼다.
물은 언제나 나를 가장 고요한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물속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외부의 소음보다 내부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곳.
한껏 가벼워진 몸과 얼굴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머리카락.
내뱉는 숨에 맞춰 보글거리며 수면 위로 향해 올라가는 물방울.
그 조용한 세계가 어쩌면 내게 가장 편안한 안식처였다.
아주 어릴 적,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어린 시절 내내 물을 두려워했다.
물이 발목 위로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고 얕은 물에서조차 한 걸음은 내게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정면으로 맞설 정도로 용감한 꼬마는 아니었다.
수영장에 가면 늘 계단에 앉아 절대 빠져 죽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서는 곳에서만 놀았었다.
하지만 물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을 좋아했다.
얕은 물에 엎드려 얼굴을 담그고 숨을 참고 있으면 세상이 사라지고 나 혼자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 보다 평온이 더 컸다.
그토록 고요한 공간은 점점 더 나를 깊은 곳으로 이끌었고 어느새 물속은 나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물속이 그토록 고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물을 무서워하는 어른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수많은 음료 중 고심해서 고른 가장 맛있는 생과일주스, 하나하나 직접 골라낸 이름 모를 과일들, 우리 밖에 없는 수영장.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 우리 것처럼 느껴졌다.
늘 그렇듯 행복은 시간을 빠르게 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시계를 보자 어느새 수영장 마감시간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때맞춰 내리는 빗방울이 우리에게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속삭였다.
짐을 챙기고 남은 과일들을 입에 쑤셔 넣었다.
과즙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행복했던 수영.
달콤한 망고의 향.
촉촉한 밤공기.
물에 젖은 피부의 촉감.
한국으로 돌아가 이 호텔을 떠올릴 때면 지금 이 순간이 떠오를 것 같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망고가 가득 입안을 채우겠지.
가지고 있던 기억 위에 또 다른 기억이 겹쳐진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닌 양쪽 모두 더 선명하고 풍성해진다.
같은 여행지를 다시 방문해도 좋은 점이 여기에 있다.
그곳의 추억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
나의 기억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불보다도 묵직해졌다.
물놀이를 마친 우리는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샤워를 했다.
물놀이 후에는 몸이 노곤해진다.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어 잘 준비를 마친 그때 일이 생겼다.
옷가지를 정리하던 세희가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세희의 라오스에서 사용할 전재산이 들어있었다.
야시장에서는 가지고 있었으니 오는 길에 흘렸거나 호텔 어디선가 잃어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객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세희와 나는 객실 밖을, 민아와 민정이는 객실 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불 꺼진 호텔 안을 플래시로 비추며 수영장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수영장에 다다랐지만 지갑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빗소리만이 조용한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우산을 쓴 채로 어두운 수영장 주변을 돌며 휴대폰 플래시로 구석구석 비춰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갑은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수영장에 가지고 들어가지는 않았지?”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었지만 어쩐지 세희의 대답에 확신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수영장 안 쪽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주변을 돌며 격자무늬 바닥을 유심히 보던 때에 어딘가 이상한 곳을 발견했다.
격자무늬가 조금 어긋나 보이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곳은 수심이 2m인 가장 깊은 쪽이었다.
어두워서 자세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틀어진 격자무늬가 신경 쓰이는 정도였다.
세희를 불러와서 함께 확인했지만 안경이 없던 세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세희는 내일 확인하면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이동을 해야 한다.
다녀오면 퇴실을 준비해야 하고.
그 안에 잠깐 수영장을 확인할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있다 해도 누군가 가져간 뒤가 아닐까.
나는 지금 당장 저곳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 확인하지 않는다면 아마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희가 다른 곳으로 간 사이 가운을 벗어두고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세희가 밖으로 나오라며 소리쳤지만 금세 고요 속으로 흩어졌다.
모든 소리가 멀어진 순간 내 발가락 끝에 무언가 닿았다.
물속으로 잠수했다.
잠깐 사이에 느껴지는 고요함에 넋을 잃을 뻔했지만 세희의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물안경이 없으니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마침내 손끝에 닿는 그것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움켜줘고 힘껏 물 밖으로 올라왔다.
물 밖으로 가지고 나와보니 정성스럽게 접혀있는 지폐가 들어있는 지갑이었다.
왜 지갑을 수영장에 가지고 들어갔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세희와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산속을 날아다니고 물놀이를 즐긴 평화로웠던 하루가 갑자기 다사다난한 하루로 마무리가 되었다.
어쨌든 지갑을 찾은 것은 다행이었다.
모두가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물속에서 찾은 것은 지갑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누게 될 이야기와 추억의 조각.
기억이라는 것은 신기하게도 좋은 것만을 남긴다.
쏟아지던 빗줄기나 차가운 수영장의 물은 금방 잊을 것이다.
오직 따뜻한 순간들만 남겠지.
아마 바보같이 지갑을 들고 수영장에 들어간 바보 같은 실수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이 얼마나 차가웠는지는 벌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