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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나니 Jul 13. 2023

너무 싫으면 그냥 사랑해 버려요

비가 오는 날엔

나는 비가 싫었다.

폐에 습한 공기가 한가득 들어차고

바지 밑단부터 축축해지는.


특히나 갑작스럽게 내린 비는 더더욱.



그날이 꼭 그랬다.

엄마와 멀리까지 장을 보러 갔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양손 가득 장을 보았던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럽게 비를 만났다.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비까지 맞게 된 사춘기 소년은 걸음 내내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방긋 웃으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보라 말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우리는 함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발에 닿는 빗물이 시원했고

당신의 미소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당신이 사랑하는 비를 나도 사랑하게 된 것이.


시원하게 내리던 비,

언덕을 타고 내려오던 빗물을 발로 밟았던 것,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던 빗줄기,

당신의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



너무 싫으면 그냥 사랑해 버린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기에,

어쩌면 내가 사랑한 건 내리던 비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사랑했기에 당신이 사랑한 비마저도 사랑하게 된 거겠지.



아직도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그때로 돌아가 그 길 위에서

당신과 함께 비를 맞는다.


갑작스러운 비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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