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생각해 보면 당신과의 추억이 많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나의 이야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
당신의 이야기는 이미 중간을 한참이나 지나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아닌 당신의 이름이 참 낯설었다.
낯선 그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본다.
한 인 구.
어린 날 무수히 불렸을 그 이름을 나는 당신을 잃고 나서야 불러본다.
그 이름은 곧 아버지가 되었고,
비로소 나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서서히 바뀌어가는 이름들의 삶에 당신은 행복했을까.
짧지만은 않았던 그 삶 속에서 당신이 넘치게 행복했었다면 좋겠다.
우리는 당신을 잃었다는 표시로써
왼팔에 완장을 차고
왼쪽 머리에 핀을 꼽고 당신 앞에 섰다.
문득 마주한 할아버지의 사진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 사진을 찍는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웃음도, 슬픔도 없는 표정 뒤에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끝끝내 알지 못하겠지.
이별에는 흔적이 남는다.
우리의 이별은 영원한 안녕임으로
당신의 흔적은 참 오래도록 남겠지.
당신이 참 많이도 생각이 날 것이다.
노인의 낮은 혼잣말을 들을 때,
멋진 양복을 볼 때,
반짝이는 국가유공자의 배찌를 우연히 마주할 때.
당신은 문득문득 떠오르겠지.
처음에는 많이도 울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웃을 것이다.
나아가면 나아질 테니까.
살갗이 데일 듯한 여름 안에서,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들 사이에서
당신을 보낸다.
한여름에도 멋진 양복을 고수했던 당신이니까
아마 가시는 길에도 꼭 멋진 양복을 입었을 것이다.
이제는 답답한 호흡기도
불편한 여러 전선들도,
지팡이도 없이,
당신의 두 발로 뚜벅뚜벅 멋지게 걸어가겠지.
나중에라도 꿈에 한 번 와주세요.
근데요, 저보다 우리 아빠 꿈에 먼저 가주세요.
아빠가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해 드렸다고,
할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었는데
아마 할아버지는 못 들었을 거예요.
그 말,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다 듣고 한 번 꼬옥 안아주세요.
오늘 하루종일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아빠가
아이처럼 마음껏 울어버릴 수 있게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세요.
저에게는 그다음에 오셔도 괜찮아요.
안녕,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