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행운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운에 의해 작은 성공을 이루어내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보통만큼만 가도 다행인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처음 가본 필리핀의, 처음 가본 카지노에서였다.
처음 진행해 본 큰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고 휴식을 위해 방문한 마닐라였다. 세부에 가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이 애매해 아쉬운 대로 결정한 마닐라행 비행기였다. 그렇게 차선책으로 선택한 마닐라는 여태껏 내가 가보았던 동남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휴양지라는 느낌보다는 물가가 조금 저렴한 도시 같은 느낌이 강했다. 내 머릿속에 박혀있는 휴양지의 이미지는 새파란 바다와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현지인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놓여있는 열대과일들과 마사지숍 등이었기에 높다란 건물들과 대형쇼핑몰들은 마닐라를 휴양지라고 인식하기는 어려웠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닐라 시내를 구경하는 동안 택시는 안전하게 나를 호텔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예약한 호텔이었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났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마닐라의 “오카다호텔(Okada hotel)”로 디즈니 드라마 “카지노”의 촬영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답게 호텔 입구에는 수많은 가드들이 서있었고 저마다 잘 훈련되 보이는 사납게 생긴 강아지들을 한 마리씩 데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자동차 문을 열자 다행스럽게도 벨보이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입구에는 공항을 방불케 하는 보안검색대가 등장했다.
가지고 온 모든 짐들을 검사하고 금속 탐지기로 나를 구석구석 스캔했다. 기기들도 방금 지나온 공항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대단했던 규모는 안으로 들어오자 더욱 놀라웠다.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와 족히 3층 정도의 높이는 되어 보이는 천장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심지어 호텔 안에는 쇼핑몰들과 여러 음식점들이 입점해 있었고 3개의 대형 수영장과 마닐라 최대 규모의 분수쇼까지 즐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대망의 카지노가 있었다.
카지노라는 단어는 내게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박혀있었다. 카지노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대개 가진 돈을 모두 잃고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나 집안 곳곳에 붙어있는 빨간딱지, 퀭한 눈과 다크서클,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도박 중독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체크인을 기다리는 동안 유심히 바라본 지도에서 카지노를 발견했을 때 저곳에는 절대로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이동하던 도중 보게 된 번쩍번쩍한 카지노의 광경에 무너지고 말았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풍경 속에 내가 들어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딱 한게임 정도만 해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재미 삼아 몇 푼으로 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잠깐 본 광경에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보니 그때 이미 밤늦은 시간에 슬금슬금 카지노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예견된 미래였을지도 모르겠다.
첫날의 일정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호텔 내의 음식점에서 느지막한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고 나가 SM몰을 구경하는 것이 오늘 하루의 전부였다. 그러나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에 대단하지 않은 일정에도 눈꺼풀은 쉽사리 무거워졌다. 잠깐 눈 좀 붙이고 호텔을 천천히 구경하겠다는 생각으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새벽 2시쯤 눈을 떴다.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룸서비스를 주문한 뒤 야경이랄 것도 없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 식사를 마치고 바로 잠에 들 생각이었지만 원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 아닌가. 배의 허기를 달래자 이번에는 경험에 대한 허기가 내 발을 보채기 시작했다. 당장 이 방을 벗어나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었다.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에 열려있는 가게를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치안이 좋지 않다는 나라에서 새벽에 혼자 밤산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카지노.
거기에 가봐야겠다. 경험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말을 핑계 삼아 가방에 여권과 현금을 챙겨 방을 나섰다. 규모가 엄청난 호텔답게 층마다 직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내 층에 배치되어 있던 직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going?”
“Casino.”
짧은 대화였지만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직원이 눌러준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1층에 도착했고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내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오면 어쩌지? 완전히 시간낭비일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나갔지만 내 발은 계속해서 카지노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카지노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고 가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래, 기껏 온 여행인데 돌아가서 풀어낼 썰이라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카지노에 도착해 입구에서 여권을 검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들어선 카지노는 생각만큼 날이 서있지는 않았다. 사실 그보다 훨씬 평범하고 평화로웠다. 영화 속에서 자주 보았던 팽팽한 긴장감과 숨 막히는 심리전, 전재산이 걸린 단판승부 등 상상했던 장면들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입고 평범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기가 죽을세라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포커페이스를 위한 선글라스까지 챙겨 온 나는 어딜 가든 눈에 띄기에는 충분했다. 분명 내가 본 카지노는 모두 정장에 드레스는 기본이었는걸. 운동복에 슬리퍼는 무조건 입벤룩이 아니었나? 가방 안 가장 깊숙한 곳에 가지고 온 선글라스를 숨기며 생각했다.
무슨 게임을 해야 할까. 기계로 조작하는 게임은 돈을 잃을 것이 뻔했기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천천히 둘러보며 게임을 추려나갔다. 일단 사람이 별로 없는 게임은 피하자.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게임도 피하는 게 좋겠지. 딜러가 무서운 표정을 하거나 분위기가 엄숙해 보이는 게임도 제외했다. 수많은 게임들이 있었지만 룰을 파악하는 것은 고사하고 화면에 나오는 색깔과 숫자들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을 살펴보다 드디어 쉬워 보이는 게임을 발견했다. 적당한 인원수에 죽상을 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맴도는. 나는 이 게임을 ‘구슬칸 맞추기 게임’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카지노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룰렛’이라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구경을 하며 룰을 파악했다. 음.. 그러니까 구슬을 돌려 그 구슬이 멈추는 자리를 예상하는 게임 같았다. 구슬이 멈춘 칸의 숫자가 홀수일지 짝수일지, 높은 숫자일지 낮은 숫자일지, 빨간색일지 검은색일지 등등. 지켜보니 꽤 확률이 높아 보였다. 여러 군데에 분산투자(?)를 해둔다면 적절히 방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칩을 교환해 주는 곳으로 갔다.
카지노 회원 가입을 할 수 있기에 즉석에서 사진도 찍고 카드를 만들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 소득을 적는 칸을 월 소득으로 착각해 적었다. 한국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사실 오늘이 첫날이라 이곳의 화폐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였기에 가져간 돈 중 가장 큰 단위의 지폐 5장을 지불하고 색색의 칩을 받아 돌아왔다.
이제 게임을 시작할 차례.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룰렛은 여러 테이블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내가 처음에 보았던 테이블은 칩을 교환해 오는 사이에 사람들이 많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 옆 테이블 2곳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앉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 두 개의 테이블 중 선한 인상의, 조금 심심해 보이는 얼굴의 딜러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털썩 앉은 나를 꽤 흥미로운 얼굴로 살펴보았다. 게임을 할 거냐고 묻기에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했고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며 베팅을 지시했다. 나는 처음인 티가 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옆 테이블에서 본 것처럼 칩을 여러 칸에 올려두었다. 좋아, 자연스러웠다. 내가 처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내 칩을 가리켰다. 어색하게 웃으며 잘 모르겠는 표정을 하자 그녀가 주먹 쥔 손에서 손가락 2개를 펼쳤다. 2개를 더 내라는 것 같았다. “ah, ok, ok.” 중얼거리며 칩 2개를 그 위에 올렸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구슬을 꺼내 들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판 위에서 그것을 돌렸다. 구슬은 마치 회전하는 바퀴처럼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틱틱 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슬은 점점 속도를 줄여나갔고 드디어 멈추었다. 검은색 20. 헉! 맞췄다. 처음이니 내 생일인 20이 쓰여있는 칸에 걸쳐 올려둔 것이 딱 맞은 것이다. 심지어는 색깔도 검정에 걸었기에 2개나 맞출 수 있었다. 딜러는 다른 칸의 칩들은 정리하고 맞춘 칸의 칩에 여러 칩들을 쌓아두었다. 어디 칸이 몇 배를 주는지는 잘 모르나 확률이 적을수록 높은 금액을 주었다. 예를 들면 색을 맞추는 것은 2분의 1 확률이기에 주는 칩이 적었지만 숫자를 맞춘 곳에는 꽤 많은 칩을 쌓아주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게임을 계속 진행했고 당연히 잃기도 했지만 여러 곳에 분산해 두었기에 완전히 잃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흥미가 떨어졌는데 그건 내가 잃는 칩이 많아졌다는 이유가 컸다. 아쉬울 때 끝내는 게 가장 좋다는 말에 힘을 입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가방에서 짤랑거리는 칩들을 들고 다시 현금으로 바꾸었다.
과연 나는 이곳에서 얼마를 벌었을까. 받았을 때보다 많은 칩을 들고 왔으니 분명 돈을 벌기는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칩을 드렸고 지폐를 받았다. 처음에 가장 큰 단위의 지폐를 5장 냈었는데 돌려받은 것은 11장과 자잘한 돈이었다. 처음 해본 도박에서 2배가 넘는 돈을 따내다니! 과연 초심자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흥이 잔뜩 오른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처음 카지노에 내려갔을 때와 같이 뛰었다. 환전을 얼마 해오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돈을 벌어오다니. 내 자신이 참 기특했다. 혹시 내가 몰랐던 적성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이 세계에서는 내가 도박왕일지도. 그 이후로도 일정이 끝나면 여러 차례 카지노에 방문했지만 첫날만큼 벌지는 못했었다. 도박왕의 명예를 더는 실추시킬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카지노와 멀어졌다. 지금은 그저 재미있었던 카지노 입문기로 남아있다.
Ps. 내가 앉았던 자리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를 그다음 날 알게 되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최소 배팅 금액이 가장 높은 테이블이라서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도박왕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