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이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입니다. 출근이 늦은 탓에 아침 시간만은 온전히 내 것으로 누릴 수 있지요. 바쁘지 않은 아침을 누리는 건 분명 호사스러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방학이 끝났습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바쁘게 등교준비를 하고 그런 애들 아침 한술이라도 먹이기 위해서 깨우는 소리, 씻는 소리, 식기 소리, 아침을 준비하는 바쁜 소리들. 그렇게 한바탕 등교전쟁이 끝나면 집안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그렇게 아침을 준비하는 분주한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나 혼자만의 여유와 느긋함이 조금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침의 여유를 침해받고 싶진 않아요. 최대한 성실하고 충실히 느긋함을 즐기는 것이죠.
혼자 아침 운동을 나가거나 게으른 늦잠을 자기도 하고 비실비실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온 집안을 헤집으며 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청소는 할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이렇게 확실하게 보장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요? 청소는 분명 그중 하나가 틀림없습니다.
가장 먼저는 환기지요. 베란다와 방방마다 창문을 모두 열어서 새롭고 신선한 공기가 집안을 가득 채워줄 때까지 욕심스레 공기를 담습니다. 그동안 침구를 정리합니다. 나와 아내의 침대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침대 순입니다. 이불을 모조리 걷은 뒤에 베란다 밖으로 최대한 팔을 뻗어 탈탈 털어줍니다. 햇빛 사이로 묵은 먼지가 날아가는 게 꽤나 통쾌합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날려버릴 심산으로 팔이 뻐근하게 아파올 때까지 확실하게 털어줍니다. 다 털어낸 침구는 빨래걸이에 착착 펴서 널어놓습니다. 청소가 끝날 때까지요. 그리고는 결연한 마음으로 청소기를 잡고 침대 밑이며 가구 아래, 문틈 사이 창틀까지 꼼곰하게 팍팍 밀어줍니다. 안방과 거실, 주방, 아이들 방까지 거침없이 마구마구 돌진해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들들 방 문을 열 때는 조금 두근거리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요. 뭔가 나오지 말아야 할 험한 것(?)이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아직까지 험한 것들을 발견한 적은 없지만 꼭 공포영화에 귀신이 나와야만 무서운 것은 아니죠. 아들들의 방에는 사춘기 사내아이들 특유의 체향과 함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괜히 방문으로 부채질을 두어 번 하고는 아까 환기를 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욱 꼼곰하게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립니다.
녀석들의 책상에는 자기만의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날은 만화책이 흩어져 있기도 하고, 수학 문제집이나 영어 단어장이 펼쳐져 있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테마를 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어지럽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웬일로 책상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기도 합니다. 나는 책상 위에 마구 흩어진 물건들이 범인이 남기고 간 흔적인 양 조심스레 살펴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도 하지요.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 날에도 이렇게 사소한 편안함과 기쁨이 흩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사소하고 잘아서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반짝이던 기쁨들. 안정되고 편안함을 주는 기쁨은 아주 작고 희미하고 가볍다는 걸 청소를 하며 깨달아요.
마음 같아서는 책상 서랍을 모조리 꺼내서 버릴만한 것들을 싹 다 치우고 싶지만 차마 아이들 서랍까지 열어보지 못하는 건, 아직 영글지 않은 그만의 세상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혼란하다는 것이겠지요. 정작 본인들은 혼란스럽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무르익고 난 후에야 비로소 부모 앞에도 꺼내놓게 될 아이들의 비밀과 진심을 벌써부터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청소를 할 때마다 겸손해지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우쳐주기 때문일까요. 사춘기 늦은 무렵에야 내 방이 생기면서 내게도 그때부터 비밀이 많아졌습니다. 책상 틈 사이에 끼워놓은 사탕껍질처럼 눈에 잘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겠죠. 보여주는 것만큼만 보여지길 바라는 시기일 테니 애써 숨겨놓은 건 모른 채 하려구요. 어쨌든 별 고민 없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내 아들들은.
사춘기, 아이들의 펼쳐진 세상을 살짝 엿보고는 방문을 닫습니다.
아내는 나보다 한살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내가 아내에게 누나누나 했다고 해요.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누나 같은 모습보다는 동생처럼 어리고 철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만 나보다 더 어른스럽네요. 팍팍한 현실 때문에 그런 걸까요? 내가 속을 많이 썩여서 그런 걸까요? 좀 더 철없이 굴어도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미안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청소를 하며 아내를 떠올립니다. 곧 들어올 아내의 환한 얼굴, 미소, 웃음이 기다려지고 현관문 발자국소리가 반갑게 느껴지도록.
아내는 나와 결혼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철없는 공주님처럼 살았고 세상 귀한 건 다 누리고 살았지요. 결혼할 때 나도 그렇게 해주겠노라 다짐하고 아내에게 약속도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해주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만 하루에 두세 번 정도는 웃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가령 아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와, 집이 깨끗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새삼스레 감탄하며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볼 때 나는 칭찬받은 아이처럼 다음에는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지요. 나는 아내가 웃는 게 좋거든요. 아들들은 가끔 아줌마처럼 웃는다고 핀잔을 주지만 아줌마처럼 깔깔거리며 웃는 것도, 햇살처럼 미소를 짓는 것도 나에게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기껏 청소 한번, 설거지 한 번으로 아내를 웃게 만들 수 있다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겠다고 생각해요.
아내는 나에게 가벼운 마음을 품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다 해내겠다는 의지나 막연함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것을 해내겠다는 정말 작은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눈앞의 순간들로 채워갈 남은 인생에 있어 더없이 소중한 동반자이지요.
결혼 후 사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순간들이었어요.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 시간,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각 지은 밥을 퍼 올릴 때 피어오르는 하얀 김, 흰쌀밥 냄새, 밥통 속에서 꺼낸 찐 감자… 이런 것들이라면 몇 날 며칠 밤새도록 말할 수도 있고요. 특별히 자랑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지만 나의 중심이 되어주었던 순간들. 이런 순간은 접착력을 가지고 있어서 온전하고 안전하게 이 세계에 나를 붙들어 맵니다. 친밀하고 다정한 마음, ‘함께’와 ‘가족’을 배우는 건 이 짧은 순간들 속에서예요. 청소를 하며 떠오르는 생각은 날쌘 긴팔원숭이처럼 여기저기 잽싸게 매달렸다 금방 또 다른 곳으로 재빨리 사라집니다.
청소기를 정리하고는 아까 널어놓았던 침구를 걷어 침대를 정돈합니다. 잠깐 널어놓았을 뿐이지만 이불에서는 까슬거리는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울상이던 주름이 펴지도록 이쪽에서 한번, 반대쪽에서 한번 당겨 팽팽하게 펼쳐 이불을 정리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분명 이불에 맨살을 부비면서 말하겠지요.
‘아, 행복해 여보’
이 기쁨이 쉽게 잊힐 것도 알기에 이렇게 글로 남겨봅니다. 다시 꺼내 읽을 때 바스락거리고 따뜻한 햇빛 냄새가 눈앞에 살아날 것을 아니까요. 그날 내 마음이 얼마나 편안했는지, 아들의 사춘기를 걱정하던 마음은 이제 얼마나 고요해졌는지 알아챌 수도 있겠죠.
아, 시간이 없어 물걸레질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날 안아줄 테고 나는 언제고 가구 위에 쌓인 먼지를 없애주는 뭔가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작은 순간을 더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