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 <어느 가족>
자신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피가 아닌 상처와 그에 파생된 유대이다.
가족이라는 형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없기에 더욱 가지고 싶어한다. <어느 가족>의 두 부부는 아이들을 자의에 의해 구제하였다. 넉넉한 환경도, 넉넉한 경제적 형편도 아니고 심지어 비합법적 생활이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꺼이 '유리'를 키우고자 하였다. '노부요'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기에 계속 어린 아이를 주워다 키웠을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는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상처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비슷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향기는 그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기에 충분했다. 그 향기는 물리적인 형태를 띠지 않지만 피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진 것에 틀림없다. 마지막 가족 구성원인 5살 유리는 가정폭력을 경험했고, 그 상처의 향기를 가장 처음 맡은 것은 노부요였다. 서로의 상처를 본능적으로 느끼며 공감하고 지난 상처에 아파해주는 두 사람은 그 어떤 엄마와 딸보다 더욱 모녀처럼 보인다.
영화의 영제목은 "shoplifters"이다. shoplifter은 좀도둑, 상점 절도범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 곳곳의 상점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훔치면서 삶을 살아가는 영화 속 장면이 자연스럽게 생각날 것이다. 한국어 제목과 함께 생각해보면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이 상상가능하다. 이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마 도둑질을 일삼는 부모 아래 아이들이 위험해보이고 서로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관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쇼타'와 '유리'에게는 그곳이 따뜻한 집이다. 그들은 피가 섞인 부모보다 아이들을 생각해주고 아이들은 가족 내에서 정을 나누고 사랑을 배운다. (아이들을 생각해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것이다. 정을 나누고 사랑을 배우는 것 역시 그 실체는 가정마다 상이하고 상대적이지만 그 본질을 동일하다.)
실제 우리 사회에 대입해본다면, 이런 가족의 모습은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아이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만약, 아이들이 집이라고 느끼는 공간이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면 사회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생각만해도 굉장한 딜레마에 봉착해버리고 만다.
단지,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얼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당신은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스테레오 타입의 가족의 모습이지 않은가. “가족”에 대한 의미 재설정이 필요하다.
가족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