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 <프란시스 하> - 노아 바움백
영화 주인공 프란시스는 그녀는 단짝 친구와 함께 살며 집세를 아끼며 살고 있는 객원 무용수이다. 춤추는 것을 사랑하지만 춤보다 친구 소피를 더욱 사랑한다. 둘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지만 대부분 그렇듯 상황이 변화하니, 둘의 상황도 바뀌며 이제 더 이상 동거를 할 수 없게 된다. 프란시스는 알고 있던 친구에게 연락하며 전전긍긍 지낸다. 무용단에서 보수를 받고 춤을 출 수 없게 되자 방세를 못 내게 되니 급기야 본가로 떠난다.
소피와는 예전만큼 사이가 가깝지 않다.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인데 왜 어색할까. 예전처럼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낼 수 없다. 소피는 남자친구와 약혼하게 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프란시스는 소피에게서 버림받은 느낌을 받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소피가 자기의 삶을 사는 건 잘못된 게 아니니까. 소피와의 사이는 언제쯤 다시 가까워질까? 아니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돈을 벌어서 집을 제대로 얻어야지! 영화를 보면서 점점 우리는 프란시스가 답답해진다.
살면서 내 이름을 곱씹어본 적이 있을까. 내 스스로 내 이름으로 나를 불러본 적이 있을까. 어색하기 그지없다. 소리 내어 불러보지 않아도 의식적으로 내 이름과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 세계를 동일시해 본 경험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름은 내 정체성이고 세계이다.
김춘수의 <꽃>에서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한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명명으로부터 시작한다. 태아는 엄마의 뱃속에서도 태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세상밖으로 나와서는 앞으로 살아가게 될 정체성을 이름으로써 부여받는다. 우주의 이름 모를 행성도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고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름은 중요하다. 이렇게나 이름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살면서 이처럼 중요한 이름을 스스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프란시스도 그랬다.
‘프란시스’는 영화 속에서 주로 친구들에 의해 이름이 불려 왔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계속 듣게 된다. 프란시스라는 이름은 프란시스 그녀의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라는 이름은 타인에 의해 계속 불려 온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만이 가진 것들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는 나라는 사람이 무얼 잘하고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내적 고민보다는 주변의 타인에게 많이 의지하고 이상적인 삶만 바라본다.
영화 마지막 부분, 프란시스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 불려지고 들리는 것에서 그녀 스스로 이름을 쓰고 그것을 눈으로 본 순간, 그녀의 주체성과 독립성이 실현되었다.
이름은 누군가에게 불려지기 위해 붙여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명찰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것에서부터 나의 정체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