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일의 양면과 얽힌 삶의 곤욕

<은퇴 이후의 삶 5>

     

  우리는 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삶이 일인지 일이 삶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엉킨 인생을 살아가느라 다들 헉헉거린다. 그런데 일에 양면성이 없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일 때문에 고민하며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일없음을 두려워하고,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것은 일의 종류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일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양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일의 양면을 예민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무려 8년간을 신학생 신분으로 공부하며 살았는데, 그때가 한참 공부 맛에 빠져들 때였는지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버스를 타고서도,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약속 장소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도,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길을 걸으면서까지 책을 읽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외워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힘들기는커녕 세상 · 인간 · 신 · 삶 · 역사의 근원 진실에 하나하나 눈이 뜨이는 것을 경험할 때마다 경탄과 희열이 넘쳤다. 60대 중반인 지금도 쉼 없이 책을 펴 저자들과 대화하기를 즐기는 것은 그 대화가 매우 깊고 진실하고 지혜롭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삶에 눈이 뜨이는 경탄과 희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참 공부의 참맛을 알아가며 공부의 피치를 올리던 신학대학원 시절에 의외의 현상이 나타났다. 동기생 중에는 공부하는 양이 너무 많다며 ‘이건 대학원이 아니라 고등학교 같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 말이 하나도 공감이 안 될 정도로 공부가 온통 기쁨이요 희열이었던 그 시절에 갑자기 공부하는 게 고역인 순간들, 공부에 뒤따르던 경탄과 희열이 사라지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의아했다. 낯설었다. 하도 낯설어서 이게 뭐지? 왜 이런 거지? 찬찬히 증상의 내막을 살펴봤다. 그랬더니 중간고사나 학기말고사 때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시험에 나올 만한 걸 골라 외우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정해진 답을 찾아 정리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어쨌든 학생으로서 시험은 봐야 하고, 최소한의 점수는 얻어야 하니까 시험공부를 하긴 했는데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 하는 공부는 왜 그리도 재미가 없는지 정말 죽을 맛이었던 것.      


  그렇게 시험 기간 내내 끙끙 앓다가 시험이 끝나면 너무 좋았다. 공부의 부담이 없어져서,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좋은 게 아니라 그날부터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희열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어서 몸이 하늘로 날아갈 듯 좋았다. 시험이 끝나는 날은 그야말로 해방의 날이었다. 시험이라는 고역에서 해방돼 진짜 하고 싶은 공부, 정말 삶을 풍성케 하고 생명을 신명 나게 하는 공부, 근원 진실에 눈떠가는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는 해방의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신학생 시절 내내 시험 기간에 가장 적게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공부하는 조금은 이상한 학교생활을 한 셈이다. 지금도 나는 과제를 싫어한다. 시험을 싫어한다. 필기를 싫어한다. 외우기는 죽도록 싫어한다.     

 

  내가 지금 일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공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공부 또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학생에게 일은 곧 공부이고, 신학생에게 공부는 곧 일이다. 스승이신 박윤선 박사님께서 ‘신학생이 공부하다 죽는 것도 순교다. 순교할 각오로 공부하라. 공부하다 죽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대로 신학생의 일인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의 양면성을 예민하게 경험했다. 공부라는 일을 통해 일의 성격, 일의 의미, 일의 무게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깊이 경험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하는 공부,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 정해진 답을 외워야 하는 공부, 외적인 필요에 따라 하는 공부는 한 마디로 고역이었다. 반면에 점수와 상관없이 의문과 씨름하는 공부, 근원 진실을 탐구하는 공부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다. 이 공부는 신나는 모험이자 희열이요 새로운 만남이자 대화였다. 


  사실 얼핏 보면 이 공부나 저 공부나 그게 그거 같아 보인다. 그런데 겉보기에 그게 그거 같다고 해서 정말 그게 그거일까? 그렇지 않다. 시험을 위한 공부와 시험과 상관없는 공부는 성격과 근원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지식을 위한 공부고, 하나는 지혜를 위한 공부다. 하나는 점수를 위한 공부고, 하나는 앎을 위한 공부다. 하나는 과정을 마치기 위한 공부고, 하나는 삶을 향한 공부다. 하나는 외적인 필요에 의한 공부고, 하나는 내적인 필요에 의한 공부다. 하나는 의문과 싸우는 공부고, 하나는 남이 정해놓은 답을 자기 머리에 채워 넣는 공부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근원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      


  나는 신학대학원 시절에 완전히 다른 두 공부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것을 경험했다. 두 공부가 전혀 다른 공부라는 것을 경험했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유치원생부터 취업준비생까지) 두 공부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어서 마음 아프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 자영업자나 회사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 경영에서 자유로운 속칭 프리랜서와 일인 기업가들까지 - 삶의 현장에서 고민하며 아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일의 양면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하여 상당수 현대인은 두 가지 꿈을 꾼다. 아예 일에서 해방된 삶을 꿈꾸거나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꾼다. 일이 아닌 돈으로 돈을 버는 건물주가 되거나 자본가가 되어 일에서 해방된 삶,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꾼다. 과연 가능한 꿈이고 바람직한 꿈일까? 그것이 진정한 답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삶은 일에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일인지 삶인지 헷갈릴 정도로 우리의 삶과 일은 거의 혼연일체이고, 누구도 삶과 일을 깨끗하게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일과 삶은 뒤엉켜 있다. 인간의 삶은 운명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좌우지간 일로 인해, 일을 통해, 일과 함께일 때 비로소 삶이 피어나는 매우 독특한 삶이다. 비록 일 때문에 삶이 흐느적거리고, 일 때문에 삶이 고통에 휩싸여 신음하고, 일 때문에 삶이 파괴된다 할지라도 일과 삶을 분리해내는 순간 삶이 죽는, 흔적도 없이 허공 속에 사라져버리는 참 오묘하고 신비한 삶이다. 때문에 일에서 해방된 삶이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소비가 전부인 삶 역시 마찬가지다. 소비가 전부인 삶을 가장 우아하고 멋진 삶이라고 상상하는 자가 혹 있을 것이고, 실제로 소비가 전부인 삶을 사는 자가 아예 없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삶을 심히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소비가 전부인 삶이 전혀 부럽지 않다. 한순간도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삶의 어떠할 것임이 훤히 보이니까. 사실 소비가 전부인 삶에는 삶의 모양과 형식만 있지 삶은 아예 없다. 소비가 전부인 삶은 지극히 저열한 삶, 지극히 저능한 삶, 지극히 불행한 삶, 지극히 무력한 삶, 지극히 지루한 삶, 존재의 상쾌함과 성취감을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너무도 비천하고 비루한 삶이다. 아니 소비가 전부인 삶은 삶의 낭비일 뿐 삶이 아니다. 때문에 소비가 전부인 삶은 가능할 수는 있겠으나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옳다. 일에서 해방된 삶, 소비가 전부인 삶을 꿈꾸는 것으로는 일의 양면과 뒤엉켜 파괴된 삶의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럼 뭐가 답일꼬?     

작가의 이전글 일이 뭐기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