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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뭐기에

은퇴 이후의 삶(4)

     

                                                      <시지포스의 바위>


  나는 둔하고 느려 터진 곰탱이는 아닌 듯 한데 그렇다고 재빠르고 영리한 여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사람이다. 일에 대한 것만 해도 그렇다. 평생 일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오직 목회 일념으로만 살다가 그 일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코앞에 닥치자 뒤늦게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으니. 십 대나 이십 대에 던졌어야 할 물음,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떼기에 앞서 묻고 고민했어야 할 물음을 은퇴를 앞둔 지금에 와서야 묻고 있으니. 매양 이렇게 뒷북이다. 물음도 뒷북. 깨침도 뒷북. 행동도 뒷북.     

 

  참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나 은퇴를 앞둔 이 나이에 나는 새삼 묻는다. 

  일이 무엇일까? 일이 뭐기에 다들 일없음을 두려워하고, 일없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일까? 일이 뭐기에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면서 동시에 일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대체 일이 뭐기에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하는 것일까?


  꼼꼼히 일의 갈래를 살펴 가며 따져봤다. 그랬더니 일이란 게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일이란 그저 살아가는데 필요한 걸 만드는 일련의 활동이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고 · 입고 · 자고 · 싸고 · 놀고 · 쉬고 · 만나고 · 보고 · 읽고 · 재잘거리고 · 배우고 · 이동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그냥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먹고 · 입고 · 자고 · 싸고 · 놀고 · 쉬고 · 만나고 · 보고 · 읽고 · 재잘거리고 · 배우고 · 이동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하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이 곧 일이었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은퇴 문제로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내 생각과 경험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우선 노트북이 있어야 하고, 전기가 공급돼야 하고,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책상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차적인 필요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엄청난 일들이 얽혀 있다. 노트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재료가 있어야 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재료들을 공장으로 실어날라야 하고, 재료를 공장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노트북을 생산하는 라인을 만들어야 하고, 노트북이 제대로 구동하도록 내장된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하고, 노트북 생산 공장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있어야 하고, 발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도로와 항만이 건설돼야 한다. 이외에도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조건들이 갖춰져야 비로소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내가 오늘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지구촌 곳곳에서 흘린 수많은 사람의 땀방울과 태양과 바람을 비롯한 우주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위당 장일순은 이 진실을 발견하고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맞다. 모든 일은 우주 전체와 깊이 연결돼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주와 연결되지 않은 일이란 아예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엄하고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삶의 진짜 친구요 길잡이라 할 수 있겠다. 옳다. 인간에게 일은 단지 일이 아니다. 단지 생존 수단이 아니다. 인간에게 일은 자기 존재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최상의 방식이며, 영광스러운 존재다움에 걸맞은 창조 행위이고, 세상과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여다. 신약성경의 주요 저자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 후서 3:10)고 말한 것이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앞다투어 일을 신의 소명이라고 주창한 것도 아마 그런 배경에서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일은 우주와의 협력이니까. 일은 곧 삶이니까. 일은 곧 자기표현이니까. 우리가 애써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도 생각이 아닌 일을 통해 확보되니까.      


  그러니 일해야 한다. 일없이 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차원의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은 무거운 짐일 것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살아야 하고 자식을 가르쳐야 하니까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할 것이고, 일에 치여 존재와 삶이 으깨어지는 아픔을 겪을 것이다. 


  이곳 brunch에서 전직 언론인 하륜 씨가 기자 생활 5년 만에 신문사를 퇴사한 이유를 밝힌 글을 읽었다. 이유가 3가지였는데 두 번째 이유가 기사를 쓸 때 느끼곤 하는 인지부조화란다. 즉 자기가 쓰고 싶은 기사와 신문사가 쓰길 원하는 기사의 방향이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내적 갈등 때문에 퇴사했다는 것이다. 

  또 [퇴사는 여행]의 저자 마케터 정혜윤은 책에서 10년 동안 5개의 직장을 퇴사했다고 말한다. 모두 좋은 직장이었지만 자기에게 맞는 일, 자기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입사와 퇴사를 반복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가 밝힌 자발적 방황의 이유는 이랬다. “그때까지 얻은 것이 많았다. 네트워크도 넓어지고, 좋은 경험과 사람들을 얻었다. 하지만 방향이 틀어진 환경에서 앞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때 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돈도 중요하지만 난 더 많은 걸 원했다. 내 시간을 의미 있는 일에 쓰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바랐다.”(40쪽)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멋지고 행복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일을 하기 원한다. 하지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일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원치 않는 일,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꿋꿋이 감내하며 살아간다.      

  일에는 양면이 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히브리인이 듣고 살아온 원형적 이야기(창세기)에는 일에 관한 두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하신 후 땅과 하늘과 바다에 사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다(창1:28). 또 에덴동산을 일구신 후 사람을 데려다가 그곳을 돌보게 하신다(창2:15). 이 이야기는 히브리인이 일을 인간의 삶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인간에게 허락된 복된 특권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창세기 3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당신이 금한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사는 날 동안 수고와 고통이 끊이지 않게 하신다(창3:16-17). 이 이야기는 히브리인이 일을 인간의 죄와 깊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결코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참 놀랍다. 3500년 전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토록 깊은 통찰과 현실적인 이해를 했다는 것이. 창세기가 말했듯 일은 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일은 인간에게 영광스러운 특권이기도 하고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어떤 일은 복이고 어떤 일은 저주인 게 아니라 모든 일이 복이면서 동시에 저주다. 옳다. 모든 일은 양면적이고, 모든 사람은 양면적인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 사람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유력자든 무력자든, 주인이든 종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은 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한 일을 하며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일없음을 두려워하고, ‘일하고 싶음’과 ‘일하고 싶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것도 일이 가진 양면성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일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아파하고 있다. 일의 양면성 앞에서 곤혹스러워하며 곤욕을 치르고 있다.    

  

  현대인의 처지는 더 처절한 듯하다. 예전의 사회와 삶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일도 단순했고, 일이 단순했던 만큼 일의 양면성이 그리 날카롭게 충돌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와 삶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할 뿐 아니라 일이 자기 능력과 시간과의 거래라서 일의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기가 모래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기보다 더 어려워졌다. 현대인이 유난히 일 때문에 골치 아파하며 신음하는 것도 일과 삶의 조화, 일의 양면성의 조화가 뿌리부터 으깨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이란 일부 자본가를 제외하고는 돈을 받고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파는 거래로부터 출발한다. 프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만 그러는 게 아니다. 고액 연봉자만 그러는 게 아니다. 모든 노동자가 고용주와 고용 계약을 맺고 일한다. 단체 협약이든 개인 협약이든. 그리고 대다수 직장인이 자기 계발을 위해 쉼 없이 질주하는 것도 남보다 좋은 조건으로 자기를 팔기 위해서다. 


  현대인은 자기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과거에는 노예들이 강제로 자기 노동력과 시간을 파는 계약을 했다면 지금은 직장인들이 자원하여 자기 노동력과 시간을 파는 계약을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기를 파는 거래라는 본질은 같다. 현대사회는 자기를 팔아 일하는 거대한 인력 시장이다. 그리고 거대한 인력 시장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기를 팔아 살아가는 불행하고 무력한 세일즈맨이다. 선택의 폭이 넓으냐 좁으냐, 계약 가격이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 약간의 희비가 엇갈릴 뿐.   

   

  참 비극적이다. 자기 능력과 시간을 팔아야 일할 수 있다는 면에서, 또 자기를 파는 한 주체적 선택과 시간 사용이 제한된다는 면에서 참 비극적이다. 다들 자기표현으로서의 일, 삶을 풍성케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를 파는 행위로서의 일, 자기 존재와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일을 감내해야 한다는 면에서 참 비극적이다. 은퇴자들은 일하고 싶은 열정은 있는데 자기 능력과 시간을 사는 구매자가 없고, 혹 구매자가 있어도 일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면에서 참 비극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비극적이라도 인간은 일해야 한다. 일없이 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으니까. 하여 현대인은 비극적 현실을 인지하고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한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경제적 노예로 산다. 모순이다. 심각한 모순이자 비극이다. 그런데도 모순되고 비극적인 이 길 아닌 길을, 때로는 비틀거리며, 때로는 열정적으로 질주하고 있다. 

    

  동시에 많은 이가 길을 찾고 있다. 전직 기자 하륜 씨나 독립한 마케터 정혜윤 씨처럼. 과연 길이 있을까? 자기를 팔아야만 일할 수 있는 인력 시장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일 · 놀이 · 삶 · 쉼 · 창조가 경계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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