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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다는 것은

살면서 발견한 것들(2)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권고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종말의식을 갖고 깨어있으라(마24:42, 25:13),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부탁했고(막14:3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빛의 자녀답게 깨어있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살전5:6).


  그렇다면 묻자. 깨어있다는 것이 뭘까? 기도하는 것일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것일까? 끊임없이 묻고 따지는 것일까? 유행과 시류를 거스르는 것일까? 아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묻고 따지고, 유행과 시류를 거스르며 사는 자들 중에도 깨어있지 못한 자들이 꽤 있는 걸 보면 깨어있다는 것은 그런 것 이상임이 분명하다.

  

  깨어있다는 것은 첫째로 대상을 깊이 보는 것이다. 나를 깊이 보고, 내 앞의 사물을 깊이 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깊이 보고, 내가 겪는 경험을 깊이 보고, 내 마음의 흐름을 깊이 보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적 현실을 깊이 보고 의식하는 것이다.

  둘째로 깨어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 내가 내리는 판단,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겪은 경험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지 않고 전후 맥락을 조망하는 것,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감정의 흐름과 근원을 파악하는 것, 여론이나 상식을 추종하기보다는 정말 그러한지를 묻는 것 등이 곧 깨어있음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객관의 토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정한 객관이란 존재하기 어렵겠지만, 최대한 객관적 토대 위에 나를 올려놓고 관찰하는 것, 즉 진리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추어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로 깨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을 넘어 나와 너의 경계선을 해체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깨어있음이란 본래 존재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자아의 각성만으로는 충분히 깨어있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깨어있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아의 각성을 넘어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고, 다른 존재의 깊이로 들어가야 하며, 근본적으로는 우주의 근원 진실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와 너, 우리와 만물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그물망을 인식하고, 그 생명의 그물망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아픔과 처지에 참여함으로써 깨어있음은 완성된다.  


  옳다. 깨어있다는 것은 만물과 만사를 깊이 보는 것,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것, 나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것, 만물과의 연대성에 눈 뜨는 것, 만물과의 연대성에 감사하는 것,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너의 상황과 처지에 동참하는 것, 서로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습관처럼 살지 않고 우주의 근원 진실을 응시하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결코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고통이 뒤따른다. 깨어있는 자는 깊이 숨어 있는 삶의 어두운 실상들을 응시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값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이 깨어있음의 증거일 수는 없지만, 모든 깨어있음에는 언제나 고통이 동반한다. 물론 이 고통은 두려움과 공포, 질병과 죄악에서 오는 고통과는 다르다. 깨어있는 자가 겪는 고통은 긍휼과 연민 그리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고통이고, 정화와 치유를 발화하는 창조적 고통이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고통이다.


  삶이란 역설이다. 깨어있음에는 반드시 이런 고통이 동반하며, 이런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자의 영혼에는 행복이 임하지 않으니까. 지고지순한 행복의 꽃은 고통이라는 눈물을 먹고 피어나니까. 뜨거운 고통, 창조적 고통, 행복한 고통의 이면을 갖지 않은 행복은 거품에 불과한 가짜 행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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