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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상처

판단


인간은 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생각하고, 보이는 것에 갇혀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며,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자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놀라운 존재다. 작은 우주라고 할 만큼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존재이며 동시에 만물 중에 가장 쉽게, 가장 많이, 가장 깊이 상처받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숨을 쉬듯 상처받으며 산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다양한 상처를 받으며 산다. 직장 동료의 발 빠른 승진이나 높은 연봉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 내뱉는 말 한 마디에도, 지나가는 사람의 눈빛 하나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떨어지는 잎새 하나에도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다종다양한 상처 중에 가장 깊은 상처는 무엇일까? 아마도 판단 받는 것에서 오는 상처 아닐까?


 인간은 판단하는 존재다. 사람은 쉼 없이 옳고 그름 ‧ 좌와 우 ‧ 위와 아래 ‧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산다. 그리스의 회의론자가 인간의 판단능력을 의심하며 ‘판단중지’(epoche)를 요청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심장이 고동치는 한 매순간 숨을 쉬어야 하듯, 뇌세포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매순간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감각적 차원을 넘어 인격적 차원으로, 생존의 차원을 넘어 실존의 차원으로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옳다. 옳고 그름 ‧ 좌와 우 ‧ 위와 아래 ‧ 선과 악 등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 삶이라고 하는 아름답고 심오하고 풍성한 세계, 소위 문화적 세계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은 판단하는 능력으로 인해 삶이 파괴되고 일그러지고 찢기는 경험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판단받는 것으로 인해 신음하지 않은 자들이 있는지. 판단받는 것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은 자들이 있는지. 판단받는 것으로 인해 삶이 으깨어지지 않은 자들이 있는지.

  당연히 없다. 이 땅에 사는 자는 누구든 - 잘날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 판단받아 본 경험을 하지 않은 자가 없고, 그로 인해 인격이 짓밟히고 삶이 흔들리며 영혼이 소진되는 아픔을 겪지 않은 자가 없다.


  물론 인간은 판단받는 것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으로 인해 상처받는다. 하지만 판단받는 것으로 인해 받는 상처보다 더 깊고 아픈 상처는 없다는 것, 판단받는 것보다 더 존재와 삶을 위협하고 찌그러뜨리는 상처는 없다는 것이 그간의 인생을 살면서 발견한 경험적 진실이다.  

  바울이 ‘서로 판단하지 말라’(롬14:3),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4:5)고 말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판단받는 것으로 인해 받는 상처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에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바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최대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형제에게 크고 깊은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좌우지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판단하는 존재다. 인간은 매사에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판단중지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곤혹이다. 판단하는 존재인데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 살아 숨 쉬는 한 판단하게 되어 있고, 판단하는 한 판단 받게 되어 있고, 판단 받는 한 상처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의 곤혹이요 삶의 곤욕이다.  


  과연 길이 없을까? 이 곤혹과 곤욕을 가로지르는 길이 없을까? 매우 어수룩하지만 하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단하되 판단할 때마다 그 판단을 지우는 노력을 하는 것. 판단하되 자기 판단이 부분적인 것(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기 판단을 상대화하는 노력을 하는 것. 자기 판단을 애써 지우고 상대화함으로써 자기 판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이것이 형제를 판단함으로써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죄를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쉽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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