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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단지 일없음의 문제가 아닌 일없는 시간의 문제

은퇴 이후의 삶(2)



  앞서 말한 대로 은퇴란 일차적으로 일을 내려놓음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일, 과업으로서의 일, 직책을 갖고 수행하는 일을 내려놓음이다. 일에서 물러남, 일없이 살게 됨이다. 물론 지금의 은퇴는 과거와 많이 다르다. 


  과거에는 은퇴가 대부분 나이의 문제였다. 나이가 차서 노동하기 힘들어질 때쯤 직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은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와 별 상관이 없다. 요즘은 일과 쉼의 경계가 명확지 않거니와 나이와 상관없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일과 쉼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퇴사하고, 어렵게 취업했으나 그 일이 자기와 맞지 않아 퇴사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퇴사하고, 자기 일을 하기 위한 준비용으로 취업한 후 적당한 때 퇴사하고, 경직된 조직문화가 맘에 들지 않아 퇴사하는 등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20-30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풍속도다.    

  

  이처럼 나이와 상관없이 퇴사가 자연스런 시대, 한 직장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하는 N잡러 시대, 일의 특성에 따라서는 평생 현역으로 살 수도 있는 시대, 일과 쉼이 선택이 된 시대에 은퇴란 어쩌면 과거의 유물이 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은퇴는 존재한다. 누구든 언젠가는 일할 수 없는 때, 일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오니까 말이다. 


  그런데 은퇴가 꼭 일의 있고 없음의 문제이기만 할까? 그렇지는 않다. 은퇴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일없음’이라기보다 ‘일없는 시간’의 문제에 더 가깝다. 즉 은퇴하기 전까지는 일로 삶을 채웠는데 은퇴 후에는 맡겨진 일, 처리해야 할 일이 없이 삶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 은퇴 문제의 핵심이요 본질이다.   

   

  이재용 감독이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이 문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몸 파는 늙은 여자로 분한 주인공 윤여정이 세 노인의 죽음을 도와주는 이야기다. 세 노인은 처한 상황이 제각각 다르다. 


  첫 번째 노인은 돈도 있고 멋도 낼 줄 아는 부자 영감이다. 자식도 미국에서 잘나가는 세칭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져 요양원에 들어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 혼자서는 밥도 먹을 수 없고, 똥도 쌀 수 없는 신세가 된 것. 죽고 싶어도 혼자서는 못 죽는 신세. 노인은 완전히 추락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윤여정에게 ‘제발 나를 죽여줘. 나를 도와줘’라며 통사정을 하고, 윤여정은 망설이다가 결국 죽여 준다. 


  두 번째 노인은 아주 건장하게 생겼다. 평생 병치레라고는 안 해보고 산 사람 같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치매에 걸렸다. 인지 능력을 점차 상실해 간다. 방금 전에 약을 먹고도 약 먹은 걸 기억 못 한다. 자칫하면 자기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노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친구 전무송(영화 속 세 번째 노인)은 윤여정에게 ‘저 친구를 좀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던 윤여정이 결국은 함께 산에 올라 치매 걸린 노인을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 죽여 준다. 


  전무송이 연기한 세 번째 노인은 아내와 자식을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혼자 남아 꾸역꾸역 살아간다. 기력이 약해져 섹스조차 불가능해진 몸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고는 있지만,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에 환멸을 느낀 노인은 이 비루한 삶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혼자 죽는 것이 무섭고 외로워 죽음을 결행하지 못하다가 고민 끝에 윤여정을 죽음의 자리에 초대한다. 혼자 죽기 무서우니 죽을 때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윤여정은 전무송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텔에 함께 들어가고, 전무송은 윤여정에게 준비한 수면제 한 알을 건네고 나머지는 자기 입에 털어 넣은 후 반듯하게 누운 채 길고 긴 잠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세 노인의 자살 아닌 자살 이야기를 통해 일없이 사는 노인들의 외적 현실과 내적 현실이 얼마나 처참하고 남루하고 무거울 수 있는지를 보았다. 사실 세 노인은 시간을 사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그저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남루하게 추락한 존재의 비참함에 절규하면서, 딱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삶에 환멸을 느끼면서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휘청거리다가 결국 시간을 죽이는 것으로 끝을 내고 있었다. 시간의 죽음만이 저들의 구원인양.  

    

  사실 이것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실의 모든 은퇴자 또한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일없는 시간의 문제와 직면하고 씨름해야 한다. 이것이 은퇴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첫 번째 싸움이자 가장 힘든 싸움이고 가장 절실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백수가 바빠서 과로사한다” “너무 바빠서 백수 못 해 먹겠다”는 우스갯소리들도 하지만 이런 말의 이면에는, 일로 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현실을 방어하려는 무의식적 방어심리와 무엇으로든 시간을 채우겠다는 의욕의 과잉이 낳은 부작용의 결과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심지어 ‘나는 일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지 않아!’라고 외장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도 든다.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외면한다고, 회피한다고, 눈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은퇴 문제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은퇴 문제를 진정으로 극복하고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은퇴 문제의 핵심 본질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은퇴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은퇴 이후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일로 채울 수 없는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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