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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하며 살지?

은퇴 이후의 삶(3)

                                                         


 

  앞서 은퇴 문제의 핵심은 단지 ‘일없음’이 아니라 ‘일없는 시간’이고, 일없는 시간의 문제와 마주하고 씨름해야만 은퇴라는 인생의 전환기적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없는 시간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문자 그대로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원 진실을 찾기에 열심이었던 필자조차 삶의 전부였던 목회를 내려놓을 생각을 했을 때 제일 먼저 튀어나온 고민은 ‘그럼 뭐하며 살지?’였으니까. 그렇다. 은퇴를 앞둔 이들의 일차적 고민은 ‘앞으로 뭐하며 살지?’다. 


  ‘앞으로 뭐하며 살지?’라는 고민은 언뜻 일없음에 대한 고민 같다. 일을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 대한 고민 같다. 하지만 ‘앞으로 뭐하며 살지?’라는 고민 속에는 세 가지 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 ‘앞으로’에는 일없이 살아갈 시간에 대한 고민이, ‘뭘하며’에는 남은 세월을 채울 일에 대한 고민이, ‘살지?’에는 일없는 삶에 대한 아주 깊은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다. 비록 이런 고민을 의식하며 철학적으로 하진 않을지라도 ‘앞으로 뭐하며 살지?’라는 물음 속에는 이미 일없이 살아갈 긴긴 시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일없는 삶에 대한 깊은 회의와 혐오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자. 왜 다들 일없는 삶을 혐오하고 회의하는 것일까? 왜 다들 일없이 사는 시간을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일까? 일없는 시간이 무의미해서일까? 일없이 사는 것처럼 지루하고 무료한 게 없어서일까? 일없이 빈둥거리며 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수치라고 생각돼서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일없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일없이 사는 것을 무료해하고, 일없이 소일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수치로 여기는 진짜 이유는 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일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것. 우리의 정체성과 삶까지도 일에 의해 평가받고 규정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일 중심 사회로 구조화됐다는 것.     

 

  우리 사회를 일별해보라. 한눈에 우리 사회가 일 중심 사회, 일 지향 사회라는 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거의 일에 미쳐 살고, 일에 지쳐 산다. 일에 의해 평가받고, 일을 통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확인하고, 일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관계의 네트워크를 획득하며 산다. 또 어디를 가나 일이 많은 사람 ·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 · 훌륭한 사람으로 통하고, 일이 없는 사람 · 게으른 사람은 무능한 사람 ·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통한다. 한 사람을 볼 때도 인격의 차원에서보다는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해온 사람인지 등 일의 차원에서 본다. 이뿐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 결정되고, 인간관계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진실로 그렇다. 현대사회는 사회 구석구석이 일에 의해 구성되고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삶의 리듬도 일을 따라가고, 주거 공간도 일을 따라가고, 심지어 결혼까지도 동종업종 커플이 늘어날 정도로 일을 따라가고 있다. 가히 완벽한 일 중심 사회다.   

   

  물론 사람이 일하지 않고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이 삶의 중심이지는 않았다. 우리 문명이 산업화되기 이전 시대까지만 해도 일은 삶의 중심이 아닌 주변이었다. 아니 예로부터 일은 저주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이나 우리 선조들만 해도 일하는 사람을 천대했다. 일은 언제나 노예나 종의 몫이었고, 주인은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존경받았다. 불과 150년 전의 조선 시대만 해도 양반은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양반이 일하는 건 수치였다. 

  그러니 어느 누가 일없는 시간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했겠는가. 어느 누가 일없는 시간 앞에서 깊이 고민했겠는가. 다들 일없는 시간을 살고 싶어 했는데. 일없는 시간을 최상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꿈꿨는데.    

  

  그랬다. 예전에는 일을 신의 저주요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없이 사는 것을 재앙이요 저주라고 생각한다. 일없는 시간을 꿈꾸고 부러워하기는커녕 일없는 시간을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마음 한편으로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더 깊은 곳에서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두려워한다. 아니 일로부터의 자유보다 일할 자유를 더 열정적으로 갈망한다. 돈 욕심에 끝이 없듯 일 욕심이 끝이 없다.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정말 아이러니다. 누구도 일을 원치 않는데 누구나 일없음을 두려워한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일없음, 일없는 시간을 부러워하기보다 외려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걸까? 첫째, 일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본래 신의 저주요 벌이었던 일이 16세기에 신의 소명으로 바뀌더니 19세기부터는 그 이상으로 높아져 존재와 삶의 중심, 사회의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 전체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우리 정체성과 삶까지도 일에 의해 평가받고 규정될 정도로 철저하게 일 중심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셋째, 일 중심 사회로의 변화에 발맞춰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 중심 사회가 아니었던 과거에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루벤스(놀이하는 인간)가 주류였는데 일 중심 사회인 지금은 호모 파베르(일하는 인간)가 주류 인간으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의문이 든다면 현대사회를 깊이 들여다보라. 어떤 사람이 대접받고 환영받는지. 정부, 기업, 군대, NGO, 방송, 언론, 연예계는 말할 것 없고 학교와 가정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오직 호모 파베르를 환영할 뿐. 오직 호모 파베르에게만 제값을 쳐줄 뿐.      


  그렇다. 은퇴와 은퇴 이후의 삶이 문제적 상황이 된 것, 대다수 현대인이 은퇴 이후의 삶을 혐오하고 일없는 시간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우리의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일이 우리의 삶과 사회의 중심이 됐고, 일이 시간의 주인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시간의 주인이 아니고 일이 시간의 주인이 됐기 때문이다. 하여, 현대인은 학생, 청년, 직장인, 은퇴자 등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호모 파베르가 되지 않으면 심각한 자존감의 위기, 생존의 위기, 관계의 위기, 안정의 위기를 겪는다.  

    

  하여, 나는 진중하게 묻는다. 일이 우리네 삶의 중심이 되고, 일이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과연 유익한가? 과연 아름다운가? 그리고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대체 일이 무엇이기에 내남없이 일없음을 두려워하고, 일없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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