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v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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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저 가녀린 눈동자, 내가 가질 수는 없을까.”
아침에 눈을 떠보니, 빈자리가 허전했다. 사실 혼자 일어나고, 혼자 잠이 드는 게 물리적으로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일어날 때 마음마저 허전한 건 왠지 섭섭했다. 이런 느낌인 것인가 그 공허함은. 닫았던 커튼을 열고, 빛을 연다. 뉴스 소리가 들려서 밖에 나간다. “아버지” 하고 불러본다.
아버지는 없었다. 뉴스도 없었다. 환상이다. 빈 식탁, 노래하는 새. 어린아이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는 어느 새부터 시끄러운 뉴스 소리로 들려온다. 정신이 예사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사람 하는 일이 그러려니 하고 체념한다.
“멍청한 일이다”
작게 불러본다.
“아버지...”
꿈을 항상 기록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이번 꿈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장소 속에서 도망치고 있는 꿈이었다. 그때 저 먼발치에서 나를 향해 소름 끼치게 웃고 있는 광대를 보라. 내가 방아쇠를 당겨도 가만히 낄낄대는 웃음을 보라. 저것은 기만이다.
#1
“날 조롱하지 마”
“너보다 아는 것도 많고 나는 여기서 도망칠 거야.”
"난 자유로울 거야"
그렇게 무차별적인 난사를 하면, 어느샌가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친구를 도와주며 같이 도망 다닌다. 도망 다니다 보면, 도망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도망감을 즐기는 마음, 쫓기는 걸 즐기는 스릴, 나는 그것을 은근하게 즐긴다. 그러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은 유일한 친구라고 부르는 얼굴 모르는 이 녀석밖에 없다는 사실로 감동한다. 바보 같은 드라마 같다
“친구야. 왜 붙잡혀 있니”
“친구야, 내가 구해줄게”
친구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구야.
너는 누굴까.
저 광대에게 붙잡혀 있는 "축 늘여진 친구". 그 친구는 무엇인가 어리숙하다. 그리고 좀 귀여운 구석도 있는 것 같다. 그에 반해서 나는 뭐랄까. 조급하다고 해야 하나. 분노가 있다고 해야 하나. 체계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리숙하다고 하는 이유를 꼽자면, 그 친구가 항상 비이성적 행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 말라고 했어도, 꿈에서는 항상 반대로 하니까. 나는 행동의 이유가 있는데, 그 친구는 행동의 이유가 없어 보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엇을 하는데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냥 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급하지 않았다.
괴롭다. 그 녀석이 말도 하지 않고,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그 녀석이 나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저 시선이 선명하면 할수록 나를 잘 알 것 같은데, 유리처럼 빛나지 않아 나를 볼 수 없겠다. 흐려진 잔상으로 비춰진 나.
그래서 지금 이 고민은 중요하다.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흐리 멍텅한 눈동자 속에서 내가 하자는 것은 왜 다하는지. 그게 중요하다. 그래서 괴롭다. 앞에 있는 저 가녀린 눈동자를 내가 가질 수는 없을까.
알 수 없는 것에 쫓기고 알 수 없는 것과 함께 도망을 가다니.
“친구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저 터널을 지나가면 광장이 나올 거야. 바다 같은 저 광장은 불빛이 예뻐. 노란색 혹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는 저 하얀 광장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두막이 있을 거야. 하얀 오두막이야. 그곳으로 가. 나중에 만날게.”
#2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공간의 변화는 달려온 거리를 생각하게 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맑은 하늘과 파란 하늘.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그리고 오케스트라.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그 자리에 왔다. 하얀 펜트하우스에 하얀 구름 위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였다. 연주가 들려온다.
처음의 기대감과 웅장함은 나를 기쁘게 했고, 그렇기에 다음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더 집중해서 끝까지 바라본다.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다리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고, 피아노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시작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기대했던 다음 옥타브로의 도약은 엇나갔다. 왜냐하면 저것은 내 연주이기 때문이다. 많은 노력에도, 항상 도약이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음으로의 도약은 어렵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3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
“글쎄 제가 지금 가봐야 한다니까요?”
“.............”
“혹시 제 말 안 들리시나요?”
또 시작이라니... 내 말이 들리지 않고, 나는 답답하고 초조한 그때. 또 무엇인가 쫓기기 시작하는 이것.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이 두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고 하면, 계속 다른 층으로 인도되고, 계단으로 가자고 하니,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것이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잡으러 온다. 도망가자.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너 당장 이리 와!"
"진짜 돈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냐"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잘못한 거잖아."
"어릴 때 사달라는 거 하나 없어서 너무 고마웠어"
"넌 왜 이렇게 답답하니"
"모든 사람이 너를 주시하고 있어."
"너 요즘 말 많이 나오더라"
"겨우 그 정도 사랑 때문에 그래?"
"네가 말을 더럽게 하잖아"
초조함은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이나 층을 눌렀는지, 이제는 버튼이 다 닳아버렸다. 계속해서 닫으려고 시도하고,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애를 쓴다. 내려가도 같은 층의 같은 공간. 그렇게 계속 내려진 곳은 도서관인 것 같다.
#4
이 도서관은 어린아이 전용이다. 동화 속에는 웃는 얼굴과 화려한 색감. 미소. 그림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림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계단으로 어서 내려가야겠어." 어린아이가 웃는 것.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물총을 들고 웃는 어린아이."
그 다음층은 베스트셀러 구간이었다. 나열된 책들은 "부의 추월 차선"과 같은 쓰레기 책들이 있는가 하면, 여타 자기 계발 서적, 사상들이 아주 쭉 늘여져 있는 것이었다. 이런 더러운 것들. 우생학과 더러운 자유주의, 한편으로는 더러운 좌파의 낙관적인 진보론. 전체주의와 파시즘. 도덕 웃음이 다른 현실적 형태로 탈바꿈한듯한 그런 쓰레기 같은 미화.
성공한 도약이 순전한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신화를 팔고 있다. 왜냐하면 그게 순수해 보이니까. 노력을 해서 넘어가는 성실한 사람이기를 바라니까. 바라던 행복을 누군가가 정해주는 쓰레기 같은 기만. 쓰레기 같은 기만. 이 모든 전체주의는 끔찍해. 너무 끔찍해. 자본주의의 돈에 미쳐있고, 만들어진 사회주의 도덕 위선으로 재단하며, 그 틀로 다시 나를 분류해 내 가슴을 건드리고 조여오는 이것들.
나에게 도망치는 것은 너무 무섭고, 씁쓸하고, 스릴 넘치는 것이다. 쫓아가는 것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쫓아오는 것들은 떨어진 만큼 다시 채워서 따라오더라. 정말로 그런 것들은 무섭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걸. 미처버린 거지. 더 이상 갈 곳은 없고, 입을 찢어 웃으며, 인정해야 하는 것이겠지. 더러운 것들 앞에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따라 하는 순간이 온 걸까.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아직 쓰라릴까. 하지만 아직은 더 달릴 수 있다. 다만 주어진 그 현실이 있다는 것으로 발끝은 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처럼 주먹을 꽉 쥐고 가만히 서서 흐느낀다. 괴리감이 너무 분해서 거대한 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름의 빛에서 여기 이 지하까지 추락하다니. 심연. 저곳만큼은 가기 싫지만, 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기 시작하는걸. 무서운 권위와 실실 웃는 기만 속에 잡히기보다 차라리 심연을 택하겠다. 날개가 타고 있다. 심연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자. 저 눈물 속으로 들어가자.
#5
“어두워”
“너무 어두워”
불이라도 없을까 나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마음이 한층 진정되기 시작한다. 밖은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끈적하게 창문에 붙어서 흘러내리는 눈물. 습하고 찝찝한 바깥. 담배로 양초에 불을 붙여본다. 고요해서 불길 소리만 들리기에, 나는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에는 서적으로 가득했다. 금서라고 여겨지는 “신은 없다”와 같은 것들, 여러 도전적인 서적들. 니체의 책도 여기 있구나 싶었다. 이곳은 미래인가... 오랜 기억인가. 미래를 기억하고 싶다. 위선과 날조는 지겹다. 기만과 권위도 지겹다. 어쩌겠는가. 나는 이제 그 속에서 죽도록 앉아 있는다. 이것저것 다 읽어본다.
J와 말했던 것들, 동생과 나 자신에게 오랫동안 말해왔던 것들, 펼친 책들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종이의 질감은 내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양초에 가까이하니 불이 움직여서 글자 마저 떨렸다. 그녀가 많이 불안한가, 또한 나도 불안한가. 확실한 의문인지, 또는 다른 지식인지. 거짓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 흐려지고, 번지는 습기 속에서 잘 버티고 있어서 고마웠다. 우울함은 좋은 기억도 지워버린다니까 참.
도망치다 잊어버린 그 친구를 생각하며, 잃어버려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찾고 싶다고 말해본다. 그러자 양초에 빛이 종이로 천천히 향하면서 다음 장면이 영사되기 시작한다.
하얀 광장을 따라 내려가면 어느새부터인가 숲으로 바뀌고, 그 숲은 이제 또 높은 언덕으로 바뀌면서, 빨간색 노란색 꽃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그곳을 가봤을까. 나무로 되어있는 그 길을 따라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넓은 분화구가 있을 것이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올라가는 길에 꽃을 꺾어서 가라고 말도 못 했네. 너무 급해서. 황금 갈대가 물결치는 그곳 끝에 나무가 대칭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 텐데, 거기 가지 말고 하얀 오두막으로 가라고 하고 싶어. 쫓기더라도 한 번쯤은 가보라고 말하고 싶은데, 갈대밭을 타고 갈 배 한 척은 잘 구했는지 물어보고 싶네. 딱 한 번 가봤어. 너는 잘 알 거야.
또 영사되는 다음의 장면
겨울에 떠나간 사랑아. 지나가는 길에 나타났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통과했다. 저항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왜 내가 가는 그 길에 흔적이 남아서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장미 밭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바보같이 아팠던 사랑. 이제 제발 멀리 날아가라. 화살을 뽑고 달빛으로 쏘아 올려. 멀리멀리 떠나가라. 내게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것만큼은 믿고 싶다. 나는 이것으로 행복할 자신 있다. 그 사람도 행복할 자신 있다.
나는 일어나서 하는 일이 욕을 하고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내게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될 것 같다. 당신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 말고 항상 아버지를 찾는 것도 별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나를 해방시켜 줘.
어렸을 때 차 옆에서 자동차를 자랑하던 당신. “열심히 일해”라고 충고를 하며 위선 떠는 당신. 그리고 굉장히 선심 쓰면서 좋아하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기만과 위선 아닌가. 초등학생에게 돈을 많이 벌면 이런 것도 있다면서 돈 없이 가난하게 살지 말라고 위선 떠는 당신을 봤는가. 그러면서 별건 아니라고 돈을 내게 주고 이럴 때라도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며 돈 자랑하던 당신 아닌가.
나는 그러고는 일그러지고, 떨리는 책 페이지 세 장을 뽑아 채서 던져버렸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찾고 싶을 뿐이야."
"이런 기억 속에 친구는 없어"
“그다음”
바보 같고 어리숙한 20살. 뜻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픈 20살. 말할 응어리는 있는데 토해내지 못하면서, 정작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청춘.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픈 건지 몰랐던 어린 날들은 하나씩 다 뽑혀서 날아갔다. 아직 채울 게 많구나. 누군가는 사랑받고 싶어 온갖 난리를 치고, 갈구하며, 머리를 박았던 것들. 구겨진 종이를 보더라도 남아있는 빈 종이가 이 서적을 가득 메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적을 읽어보면 개인적인 것들 투성이다. 누군가 아픈 사랑을 했다가 실패한 것도, 그리고 노력했는데 실패한 것도, 부모에게 맞은 것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도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도.
"특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별거 아니야."
"너는 대단한 걸 한다고 생각하지."
"사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6
허무주의. 허무주의의 끝은 다시금 튀어 오르는 반동이거나, 아니면 그냥 끊어지는 것이다. 친구야 너는 어느 쪽일까. 그냥 관조하는 사람일까. 나는 항상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 응어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슬픔은 그냥 슬픈 장면이 떠올라서 슬픈 것이 아니며, 아픈 장면이 떠올라서 슬픈 것이 아니다. "허무함". 허무함은 ‘그저 그러하다’라는, 가치 내재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감정이기에 내게는 꽤나 슬프다. 정말 그저 그러하기 때문에. 내가 믿고 따라온 삶이, 사실 정말 그저 그러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온 배신감이 너무나 슬프니까. 그게 중요하다. 그래서 아프다.
"너는 물총놀이할 때 빼고 진짜 웃는 걸 본 적 없어."
"집에 몇억이나 있을 거 같아? 내가 물어볼까?"
"너는 그냥 낭만이야, 현실을 살아"
"삶은 원래 외롭고, 의미 없는 거야"
환상 문학에서 허우적 되는 한심한 남자들은 거미줄에 돌돌 말린 것처럼 서서히 죽어간다.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한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허무주의의 유혹이다. 여기서 비극은 바로 이런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남자의 자신감이다. 나는 그 사이의 긴장감을 기억한다. 그 자신감이 되려 허무주의로 잠식되어 악마에게 죽어버린 남자를 기억한다. 모든 것을 이루겠다는 과한 자신감인가. 모든 것에 대한 이유를 안다는 자신감일까. 원하는 사랑만을 얻겠다는 자신감인가!
어느 누가 자신 있게 운명이 있다고 말하며, 또 어느 누가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서 죽음을 말하겠는가. 내가 사는 삶이 의미가 없다는 환상. 그런 허무주의의 유혹 속 진실은 단지 주어진 것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의미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나’는 적어도 자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울감이라는 불만은 그저 불만이며,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 생성이 이분법이라 낄낄대는 지적 허영에 가득 찬 허무주의자들은 보라. 이분법을 벗어난 사고처럼 보이는 허무주의는 그것조차 이분법이다. 전형적인 유와 무의 싸움 아니겠는가. 좋고 나쁨의 의미가 있는 것과 의미 자체가 없는 연속적이고 영원한 삶. 유의 반대는 무라는 간단한 이분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분법 사이에 존재하고 싶다. 나와 너의 관계는 그런 이분법 사이에서 밀고 당기며 사랑하고 싶다. 나의 선택이니까. 그렇기에 나의 삶이니까.
도약의 실패 그리고 많은 괴뢰와 충돌. 부끄러운 인정욕구와 이 어두운 습기.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함, 우울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불을 밝히고 이전의 기록들을 따라 읽어내고, 찢어서 불에 먹이를 주는 이곳은 이제 건조한 이성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비록 많은 요소가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지만, 직접 책임지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 특정한 상황 속에서 태어나며, 바꾸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얼마 되지 않는 것. 주어지는 것에서, 그럼에도 노력하는 것. 그것은 이 방에 있는 빈 페이지들이 말해주고 있다.
누구처럼 어느샌가 천공을 뚫을 기세로 하늘과 가깝게 하고 싶어 올라간 것, 태양과 가깝게 하고 싶어 올라가 날개를 다 태워 심연 그 끝으로 내려간 것. 그때마다 빈 페이지들 몇 부분이 다시금 돌아보라고 써져 있을 것을 나는 안다.
누구처럼 어릴 때 해맑게 웃고 있는 물총놀이 소년에서 누구처럼 처음 아들과 함께 하는 국밥, 누구처럼 방문 뒤에서 다 듣고 눈물만 훔치는 형제. 또 마지막으로 누구처럼 하얀 집까지의 영사를 보았다. 누구누구처럼 이 책들은 다 내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이라고 말할 것이다. 누구보다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시위하겠다.
나의 날개를 태웠던 불로 눈물을 멈추자.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을 건조한 이성으로 만들자. 그러며,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분노한다. 그것을 안다. 이유를 알며, 분노한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세상을 대단하게 전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분노하는 것이다. 가슴속 응어리로 남아서, 지난 화해들을 생각한다. 지난 아픈 것들을 생각한다. 지난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7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기로 했어. 그리고 너를 내게 주어진 삶이라고 바라보기로 했어. 내 삶에 책임져야 하는 부분으로서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렇기에 날 사랑해. 아니, 사랑하기로 했어. 그래서 나는 우리가 그것 때문에 행복했다고 자신할 수 있어. 그렇기에 널 사랑해. 내 삶의 선택으로서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친구야 네가 심연 속에 들어갈 때, 네가 분노할 때, 네가 기뻐할 때 나는 언제나 그 속에 있었어. 알잖아. 이 꿈을 바꿀 수 없는 거. 꿈이라는 건 미래이며, 기억이야. 도망치는 어린것. 도약하지 못하는 모든 것. 그것은 네게 주어졌던 삶이야. 그것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야. 많은 뒤따른 페이지는 정해진 많은 양의 것들이야.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야.”
친구야.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왜곡된 것인가. 나는 그게 너무 슬퍼. 깔깔대며 웃는 저 광대가 그렇게 지껄이는 것. 그게 기만과 위선이니까. 그럴 때일수록 일부로 더 못살게 구는 친구야 제발 그러지 마. 너를 하나씩 안아줄게. 내 삶이니까. 이 모든 기억들. 내 삶이니까. 사랑해. 환상 속 진실은 바로 허무주의야. 허무주의라는 환상. 진짜 진실은 단지 주어진 것을 선택하는 것뿐이야. 눈을 떠. 진실을 마주해.
나의 모순됨을 지적하려고 낄낄대는 저 광대와 차가운 웃음. 선택해야 해. 저 웃음 나 빼고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들도 모르는 그물 속에서 웃고 있어. 선택함에 두려움을 느끼지 마.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 모순 속에 남은 것은 우리의 선택이야. 그런 선택은 왜곡을 수반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으면 그것은 환상이야.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니까.”
"아니야. 가장 간단한 진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전혀 다른 것이야. 저것은 단지 허물이고,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라는 의미를 또 만들어낸 것뿐이야."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채를 잡고 나온 것, 그것들이 바로 광대의 위선이고 거짓이야! 일어나. 눈을 떠"
교실 한복판에 자리 잡은 깔깔대는 조롱들. 사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 말더듬이 웃겨서 그냥 웃었던 기억들. 그리고 모순된 질문만 하는 것들. 저것들은 삶이 허무한 어떤 것이라는 진리에 도달한 허영심에 불과했다. 정작 그들이 만든 허물에 붙잡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런 어린 너에게 나는 왜 울기만 하는지 알고 싶었다. 왜 조롱거리가 되는지 묻고 싶었다. 왜 추격해 오는 광대를 저항하지 못하는가. 왜 총알을 그렇게 맞고도 웃으며 낄낄대는가.
"이제는 답을 해! 어서!"
#9
....
뺨을 맞았다.
....
나는 그 눈동자를 기억한다.
슬퍼하는 그 눈을 기억한다.
분노하는 그 눈을 기억한다.
삶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감 속에 있는 흐리 멍텅한 눈을 본다
나는 분노한다. 나는 분노하는 것을 안다.
사랑받고 싶은 눈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분노한다.
“앞에 있는 저 가녀린 눈동자, 내가 가질 수는 없을까.”
눈동자로서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
첫째로는 사랑받고 싶은 눈.
둘째로는 오래전 아버지에게 맞은 따귀라는 것이다.
"아버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맞고 얼얼한 채로 멍만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갈대밭과 초원. 하얀 집. 고원들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갔다. 일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를 닮은 천성에 이끌려서 눈빛은 슬픔을 담고 있지만, 사실은 관심받기를 원하는 광대이고, 사랑받기 원하는 광대였다. 누군가를 웃기고 관심받는 것이, 이름 모를 친구가 광대로서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
부드러운 눈망울과 앙상한 어깨. 갈색의 눈동자.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껴안았다. 이제는 나보다 작은 어깨 그리고 많아진 주름. 아버지가 내게 커피를 사주시겠다고 헐레벌떡 차에서 나와서 뿌듯해하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와 차를 타고 나를 웃겨주는 것에서 깨달았다. 나도 정말 이렇게 하고 있구나. 나도 누군가를 웃기는구나. 너무 분하다. 바보 같은 광대. 그 광대에게는 그것 벗어나고픈 진정한 꿈이 있다.
일어나서 얼얼한 뺨을 아버지 품에 비빈다. 그 자국이 남을 때까지 비빈다. 내게 주어진 부분이라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하면서 비빈다. 그리고 꽉 껴안아 본다. 중요한 것은 눈을 뜨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 가져가야 할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휴대폰을 켜 J를 한번 훔친다. 그리고 동생을 한번 훔친다. 바라본다. 형제여, 아버지여, 내 사랑이여!
허무한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모순 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가는 무거운 짐. 그것은 주어진 부분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족쇄와 같은 것이다. 바라보고 사랑해라. 끝까지 바라보라.
#10
나는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믿는다.
비록 내가 다 이룰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기로 결심한 나의 선택을 사랑하기로 한다. 사랑하기로 한 것이니까... 주어진 아픈 것들에서 나는 내가 한 선택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니까. 그러기에 삶은 내 것이라고 믿는다. 내 기억 속에 가본 적도 없는 하얀 집에 하얀 커튼이 불어오고, 나는 밖으로 나가 강가와 노을을 바라보며 다음 동작을 준비한다.
나는 모순된 쓰라린 활촉을 선택하고
쏘아 바라보는 순간을 믿는다.
J를 사랑해. 사랑하기로 했어.
날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그 눈을 다시 가지고 싶어.
그렇게 한발
아버지를 사랑해. 사랑하기로 했어.
작아진 어깨와, 얼얼한 뺨인 과거를 사랑해.
그렇게 두발
내가 하기로 선택한 모든 결정을 사랑해.
주어진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어.
내 선택을 사랑하기로 했어.
화살 그 끝은 내 하얀 집이다.
내 선택을 오랜 나의 미래로 보내겠다.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넓은 초원 강가 앞의 하얀 집.
어느 곳보다 순수한 따뜻한 미래의 기억.
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선택한다.
활을 잡아 두 팔 벌려 시위하는 나의 분노.
아픈 것 읽어내고 멀리 보내버리는 내 선택.
아련한 화살촉으로 남은
그 끝으로 멀리 날아가라.
곧게 날아가라.
끝까지 바라보라.
그것이 나의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