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남편이 구겨진 얼굴로 나를 부르며 용지를 건넨다.
"이리 와봐. 심각한 거야."
하지만 레이저를 쏠듯 아무리 용지를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다. 죄다 일본어니까.
남편이 손가락으로 한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게 지금 다음 주에 전기를 끊겠다는 거야. 우리가 10월 전기세를 아직 안 냈어."
둘 다 일본어 무식자지만 그나마 남편은 한자를 알기에 용지의 심각성을 파악한 것이다. 서둘러 파파고로 번역을 하니 남편말이 맞았다.
"맞다! 무슨 용지가 있었는데 자동이체 신청한다고 하고 잊어버렸네!"
그제야 가방에 열심히 모시고 다닌 알록달록한 용지가 생각났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고지서를 현관문에 달린 우편함 같은 곳에 넣어준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습관이 있다 보니 열어보는 걸 자주 깜빡한다. 그리고 용케 용지를 받아도 일본어다 보니 생각과 달리 실행이 빨리빨리 되지 않는다. 한국처럼 순삭 일처리가 안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이따 전화해야지... 이따 내야지... 이따 번역해 봐야지.... 이놈의 이따이따병.... (이따이 이따이병 아닙니다.)
'전기세가 끊기면 이 추운 날 오들오들 떨고 자야 한단 말인가?'
아무튼 남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아니 80년대도 아니고 무슨 전기가 끊기는 걸 걱정한단 말인가? 창피함과 쓸데없는 비장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고지서와 신용카드를 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로 앉았다. 용지 속 전화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역시 뭐라 뭐라 일본어가 나온다. 도쿄라는 말만 알아들었다. 아마 도쿄전력이라는 뜻이겠지. 훗. 이 정도는 예상했지. 나는 연달아 0번을 4번 정도 눌렀다. 한국에서도 보통 상담원 연결이 0번이었어서 0번으로 깔끔하게 통일해서 찍은 것이다. 다행히 자동응답기가 멈추고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되었다!!
자동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 된 것이다. 도쿄전력같이 큰 회사는 일본어를 못해도 영어나 한국어 삼자통역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일본어 자동응답기의 큰 산을 넘기면 큰일을 해낸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쓰쿠바 시청을 가서도 여러 번 통역서비스를 받았더란다.(이러니 일본어 공부가 진도가 안 나간다...) 역시나 연결받으신 분은 내가 일본어를 못하니 친절하게 한국어 통역을 연결해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 달콤한 사탕 같은 한국어로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URL을 내 번호로 받았다. 혹시나 몰라 결제 후 확인전화도 부탁받았다. ( 그런데 남편번호로 이미 URL을 보냈다는 소식도 함께 알게 되었다. 화딱지 난다.)
"제가 일본어를 몰라서 무조건 0번을 누르고 들어왔는데 그러면 직통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네~ 고객님, 그렇게 들어오신 것이 맞다고 하네요. 다음에도 그렇게 해주시면 된다고 합니다."
오잉? 아무 생각 없이 찍었는데 잘했단다. 아이들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자는 끔찍한 상상에 앞뒤 잴 것 없이 전화한 것이 맞는 행동이었다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모든 일은 이렇게 쉽게 해결되었다. 심지어 자동이체 URL도 같이 보내준단다. 이렇게 쉽게 끝날일을 여태 미루고 미뤘다니... 역시 나란 사람은 눈앞에 닥치고 마음이 급해져야 정신 차리게 되나 보다.
한편으로는 한국이라면 개미콧구멍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일에 이렇게 기뻐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추위에 고생할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아니다. 아직 수도세라는 복병이 하나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일본에서 전기세납부와 자동이체를 성공한 파워 한국주부 아닌가? 이제는 눈감고도 할 수 있겠다 싶다. (과한 성취감은 이런 부작용을 낳는다. 일본어나 공부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