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우연, 으로부터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by 리유


여유롭자고, 조급해하지 말자고, 그렇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을 떠나 태국에 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고 카오락에서도 사흘이 흘렀다. 그 사흘간, 인생에 있어 "여유"를 가지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나흘이 남았다. 나는 남은 나의 태국여행을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몸도 쉬어갈 겸 푸켓으로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푸켓에서 카오락으로 왔던 것처럼 같은 방법으로 버스를 타고 카오락에서 푸켓으로 향했다. 반나절쯤 지났을까. 짐을 가지고 버스에서 내려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푸켓은 여태껏 여행한 태국과는 또 다른 곳임을 북적이는 사람들과 클락션을 울리는 툭툭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가게들로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푸켓은 활기가 넘쳤다.


푸껫에서의 첫날. 긴 이동시간에 지친 나는 간단히 푸켓을 둘러본 뒤, 일찍이 숙소로 돌아와 잠에 들었다.


정오가 넘어가는 시간. 푸켓의 활기는 지칠 줄 모르는듯했다. 숙소까지 들려오는 소음에 나는 잠에서 깼고 그 뒤로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더 시끄러웠다. 활기가 넘쳤던 푸켓의 거리는 환락의 거리로 변해있었다. 나는 환락의 중심에서 놀 체력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과일이나 사들고, 해변에 가 밤바다를 구경하며 잠을 잘 수없는 나를 달래기로 했다.


길거리에 서있는 과일장수. 내 차례를 조용히 기다렸다. 망고와 파파야를 사기 위해 지갑을 열어봤더니 큰 단위의 돈밖에 없었다. 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사기 위해 만원을 건네는 격. 거슬러 줄 돈이 없다는 과일장수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젠장. 되는 일이 없네.'

과일을 포기한 체 돌아서려는 찰나, 앞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혹시, 한국인이에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지금껏 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 사람은 물론 한국말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한국인이에요." 나는 대답했고, 그렇게 짧은 대화와 함께 우리는 바닷가로 함께 걸었다. 그들은 한국말을 잘하는 중국인 형, 누나들이었다.


철썩철썩. 잘게 부서지는 푸켓 밤바다의 작은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 진로와 꿈에 대한 이야기. 한국과 중국을 비교하는 이야기도 나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했다. 내일, 함께 놀기로.


다음날, 점심이 넘어가는 시간. 우리는 툭툭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갔다. 20분쯤 달렸을까. 푸켓 시내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쁜 카페에 도착했다. 산 깊숙이 어딘가에 위치한 이 카페에는, 아마 나 혼자였다면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간단한 빵과 음료를 마시며 우리는 풍경을 즐겼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말 그대로 힐링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 중국인 형이 말했다. "저 바다 이쁘지 않아? 저기 서핑 타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는데, 우리도 타러 갈래?" 그렇게 우리는 덜컥 형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의 목적지는 숙소에서 바닷가로 바뀌었다.


다시 툭툭이를 타고 우리는 우리가 내려다보았던 바다에 도착했다. 서핑을 빌렸고 세상 걱정 없이 즐기는 형과 누나를 보며 나도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놀았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모였다. 푸켓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중국음식을 대접받았다.


하루가 다 가고 숙소에 돌아와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인 형, 누나들과 함께 푸켓에서의 하루를 보냈다. 일본인과 함께 여행했었던 아유타야에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함께 놀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뭔가 모를 대단함이 느껴졌다. 본받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잘 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행복감을 느끼는지. 힘들 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한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그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어, 그들은 그들의 삶을 열심히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모습에서 여유가 흘러 보였다.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중에 한 가지만 고르려 애를 썼었다. 둘 중 어느 것을 골라야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해 왔다. 그것이 정답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인생은 애초에 나에게 한 가지만 고르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나만, 나의 틀 안에 갇혀 있던 셈이다. 보지 못했던 그 틀을 오늘에서야 틀이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여행한 형 누나들로부터 찾은 틀을 벗어날 수 있는 나의 정답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둘 다"였다. 그 둘 사이의 조화를 찾는 것이 내가 찾은 정답이었다.


"믿기지 않는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이 선물해 준 잊지 못할 하루. 그 하루는 여전히 나의 태국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

만약 과일가게를 그냥 지나쳤다면, 시끄럽다고 숙소 밖으로 나가는 대신 이어폰을 끼고 잠에 들었더라면. 만약 재정비를 위해 푸켓에 오는 대신 카오락에서 더 머물렀더라면. 이 하루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이 만들어준 믿기 어려울 만큼 행복했던 하루. 그 속에서 또 한 가지를 배웠다. 나의 푸켓 여행."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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