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NE D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주 Oct 19. 2022

익어 가는 가을을 걷다

가끔은 느림으로 걸어가라.

익어 가는 가을을 걷는다

익어 가는 가을에는 풍요로운 느긋함과 시려오는 을씨년이 공존한다

익어 가는 가을 뒤로 새로이 담궈야 할 겨울을 맞이하는 걸음이다




어제의 불콰했던 토요일을 뒤로하고

오늘은 가을 트레킹을 떠나는 날이다

장소는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큰 아들은 오후에 있을 학원 수업으로 빠지고 아내와 둘째 아들이 동행한다

15리터 배낭에 생수 2통과 여벌의 재킷을 챙기고 별다방의 아이스 카페모카까지 손에 쥐고서 출발~~


사과 향 가득한 새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한발 한발 내 딛기 어려웠던 차를 어렵게 주차하고 제1관문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주차장 초입의 가판대에는 사과, 버섯, 오미자를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인해전술인 양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뚫으며 나아가야만 했다

호젓한 가을 트레킹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대략 난감한 풍경이다

사과 축제기간인 것을 모르고 온 나를 탓하고 만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드디어 1관문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제야 가을스런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1관문의 통문은 조선시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오늘따라 꽹과리 소리에 북소리까지 요란하다

큰 제를 올리는 듯 휘날리는 울긋불긋한 큰 깃발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다.

아마도 산신제를 지내는 듯 보인다.


사람들로 인한 어수선한 풍광이었지만 새재의 길은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긴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새재의 흙길을 걷자니 이내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힌다

매년 오는 곳이지만 아내나 아들들은 제3관문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오늘은 가족 모두 제3관문까지 데리고 갈 마음의 욕심을 부려본다

제3관문까지 가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아들이 자꾸만 뒤처진다

"아빠. 물이 엄청 시원해!   아빠. 저기 물고기 엄청 커!"

아들은 길 옆을 지나는 물길에 손을 담궈 물장난도 치고, 계곡 속 물고기 떼를 보자며 잡아끌기도 한다

구경하는 사람도 없는 옛터의 돌담에도 올라가 개구진 포즈를 취해본다. 영락없는 초6의 아이 모습이다.

아내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조용히 사진에 담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 팽팽히 감겨 있던 제3관문이라는 태엽이 풀린다

제3관문까지 가야겠다는 마음의 생각을 접고 발걸음을 늦춘다


그래! 쉬엄쉬엄, 천천히 길에 집중하자

익어가는 가을을 걸어보자!




길의 풍광이 과분하다

느리게 걷다 보니 길의 새로움을 발견한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그리고 머리 위에서 빠알갛게 물들어가는 단풍잎을 이제야 보게 된다

아들의 웃는 얼굴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아내의 얼굴이 마치 반짝이는 가을 햇살처럼 화사히 빛난다

길 옆 작은 폭포를 배경으로 아들과 아내의 예쁜 얼굴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게으름을 피워도 좋은 길, 새재의 가을길은 산책하듯 걸으며 오롯한 내 주위를 느끼면 되는 길이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고 기다려온 이 길의 찰나를 걷는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길이 지나왔던 수많은 계절을, 그렇게 익어온 그 길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래, 가끔은 느림으로 걸어가라!


느림의 걸음 속에서 반짝이는 가족의 얼굴을, 과분한 풍광을 발견했다면 이 또한 길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느림의 걸음으로 걷고 싶다. 가을이 잘 익은 이 길을.


이 가을의 걸음을 마치고 나면 이 길은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겠지!


완연한 추색의 새재는 아니었지만 볼에 스치는 가을바람이, 부추전이, 도토리묵이 꽤나 괜찮았던 진정한 아날로그 같은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인연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