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공간이 바꿔놓은 관계의 변화
1999년, 한국 사회는 '초고속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맞이했다.
ADSL 기술의 도입으로 인터넷 접속은 훨씬 빨라졌고, 연결은 실시간이 되었다.
웹사이트가 금세 열리고, 파일이 빠르게 전송됐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온라인에서 동시에 접속해 게임을 하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와 실시간 연결 환경은 새로운 게임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 중심에는 스타크래프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를 함께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PC방이라는 공간에 모여들었다.
ADSL은 기존 전화선을 활용하되, 음성과 데이터를 분리해 동시에 전송할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이전의 모뎀 기반 PC통신과 달리, 전화 사용과 인터넷 접속이 동시에 가능했고, 정액제 요금으로 하루 종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변화는 빠르게 확산됐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2000년에 200만 명을 넘었고, 2002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인터넷은 ‘접속하는 것’에서 ‘늘 연결된 상태’로 바뀌고 있었다.
속도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속도는 생활의 감각을 바꾸고, 관계의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1998년 4월,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됐다.
이 게임이 한국에서 유독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건, 단순히 게임의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속인터넷이 보급되던 나라였다.
PC방이 골목마다 생겨나면서, 누구나 저렴하게 고성능 컴퓨터와 빠른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청소년들도 PC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게임을 즐겼다.
또한, IMF 외환위기 이후 젊은 세대는 저렴하게 시간을 보내고, 경쟁과 협동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콘솔게임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환경도 PC와 온라인 게임의 확산에 힘을 보탰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게임은 곧 경쟁의 장이 되었고,
방송사 중계와 프로게이머의 등장은 스타크래프트를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게임들 중에서 왜 하필 스타크래프트였을까?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타크래프트는 게임 자체의 완성도가 남달랐다.
테란, 저그, 프로토스 — 세 종족이 각기 다른 전략과 개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었다.
배우기는 쉽지만, 실력에 따라 끝없이 파고들 수 있는 깊이와, 한순간의 판단으로 승부가 갈리는 빠른 템포,
그리고 Battle.net의 혁신적인 멀티플레이 환경까지,
스타크래프트는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으면서도, 실력과 전략, 연습이 결과로 이어지는 ‘공정한 경쟁의 장’이었다.
게임의 핵심은 세 종족, 테란, 저그, 프로토스가 각기 다른 특성과 전략을 지녔다는 점이다.
테란의 기계화된 유닛, 저그의 유기적이고 빠른 증식, 프로토스의 강력한 사이오닉 능력과 첨단 기술.
각 종족마다 자원 채취 방식, 유닛 생산 구조, 전투 스타일이 달라서,
누가 어떤 종족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경기의 양상과 전략이 완전히 달라진다.
게임의 기본은 자원을 모으고, 건물을 짓고, 유닛을 생산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유닛을 많이 뽑는다고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정찰을 통해 상대의 전략을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기습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심리전, 한순간의 판단으로 승부가 갈리는 마이크로 컨트롤,
그리고 끝없는 연습과 실전 경험이 실력을 가른다.
이처럼 스타크래프트의 게임성은 수많은 플레이어를 끌어들였고,
이제 그 열기는 게임 바깥, 사회 전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는 곧 한국 대중문화의 상징이 되었고,
프로게이머와 스타리그, 그리고 임요환 같은 인물들이
게임을 하나의 스포츠, 세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임요환은 그중에서도 ‘테란의 황제’로 불리며 한국 e스포츠의 상징이 됐다.
약체로 평가받던 테란 종족을 독창적인 전략과 컨트롤로 최강 반열에 올려놓았고,
드롭십과 마린 컨트롤, 전진 벙커 등 혁신적인 플레이로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었다.
2001년과 2002년 WCG 2연패, 온게임넷 스타리그 2회 연속 우승,
그리고 2003년 8월 15일 도진광과의 ‘815 대첩’ 같은 극적인 역전승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임요환의 집요한 연습과 승부욕, 그리고 “나만큼 미쳐봐”라는 말로 대표되는 열정은
당시 스타크래프트를 단순한 게임이 아닌 하나의 스포츠,
그리고 세대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프로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했고,
임요환, 기욤 패트리, 홍진호 같은 이름들이 스타리그 무대에 오르며 e스포츠의 시대가 열렸다.
팬들은 각 선수의 스타일과 명승부에 열광했고, 매 경기마다 새로운 영웅과 명장면이 탄생했다.
스타크래프트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좋은 환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PC방으로 모였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교적 저렴한 창업비용과 높은 수익성을 바탕으로 PC방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좁은 공간, 수십 대의 모니터, 라면 냄새, 키보드 소리, 그리고 담배 연기로 뒤덮인 공기.
당시 PC방의 주요 풍경에는 컵라면과 냉동만두, 떡볶이, 핫바 같은 간식이 빠지지 않았다.
게임에 열중하다 잠시 쉬는 시간, 친구들과 컵라면 뚜껑을 덮은 채 웃고 떠드는 모습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연결을 위한 공간이었지, 대화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친구와 나란히 앉아도, 각자의 화면 속에서 서로 다른 전투를 벌였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말보다는 마우스 클릭과 타자 소리가 더 컸다.
PC통신 시절, 사람들은 느리지만 글을 썼고, 답장을 기다렸으며, 감정을 나눴다.
하지만 초고속인터넷과 함께 찾아온 실시간 게임 중심의 문화는 달랐다.
이제 사람들은 글 대신 클릭으로, 말 대신 랭킹으로, 함께 걷기보다 경쟁하기를 선택했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온라인 RPG도 인기를 끌었지만, 그 안에서도 소통보다는 아이템과 레벨, 승부가 중심이 되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말은 줄어들었다.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세계에 몰두하는 시대.
'연결'은 많아졌지만, '공감'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PC방은 '친구와 함께'라는 명분으로 찾아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자리만 나란했을 뿐, 모니터 속 세계는 철저히 개인의 것이었다.
게임은 혼자였고, 몰입도도 혼자였다.
팀플을 하더라도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뿐, 함께 웃고 떠드는 순간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대화가 없다는 점이 집중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게임을 하면서도 점점 말이 없어지는 데 익숙해졌다.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속도가 관계를 밀어내기 시작한 시점’의 상징이었다.
검색창에 질문을 던지던 우리는, 어느새 답을 쓰기 시작했다.
7화에서는 네이버 지식iN과 블로그의 등장을 통해, 정보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바뀌어 간 우리들의 모습을 따라가 본다.
하나로통신, 세계 최초 ADSL 상용화 – 연합뉴스
스타크래프트, 한국 게임문화에 끼친 영향 – KBS 뉴스
스타크래프트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 네이트 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공식 홈페이지
박상현-송병구 인터뷰, 인벤
YTN 뉴스 “프로게이머 시대 연 스타크래프트...26년 인기 비결은?”
위키백과 ‘스타크래프트’
대문 이미지 : e스포츠의 성지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2007년 스타리그 결승전 (출처 : 일간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