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맑은 술은..
비
- 김 중 근
10여년 세월의 황량한 낯선 이 곳에 검은 구름 낮게 흐르고 검은 바람이 내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정수리에 박혀있는 옹이를 빼내고 싶으리만큼 진한 소주를 마시고 싶다.
지리멸렬했던 폭염이 간밤의 비에 한풀 꺽인 느낌이다. 늦여름의 비는 습하지만 정감이 있다. 그동안의 뜨거운 숨결을 식히려는 듯, 촉촉이 내린다. 그 속에는 가을을 불러들이는 조용한 힘이 숨어 있기에, 가을을 그려본다. 잎새 위에 맺힌 빗방울은 이미 여름의 빛깔을 지우기 시작해서 잎이 누렇게 바래, 탈색 중이다. 한층 더 깊고 무거운 색을 준비하고, 들녘의 곡식은 비에 젖어 묵묵히 익어간다.
내 꿈과 내 희망을 송두리채 앗아간 세월의 웅포 구석진 방에 울컥 서글픔이 밀려온다. 한치 한치마다 맺혀있는 멍울과 옹이가 외톨진 웅포에서 더욱 깊이 박혀간다. 주검 위에 넋을 잃은 망부(亡婦)같이 비에 젖은 슬픔들이 지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내린다. 이렇게 증오스런 날이 오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시절이 얼마전만 해도 있었다. 그런데 K의 공공연히 자행됐던 막말과 푼수없는 소행들로 인해, 언젠가 마음에 상처가 생겼다. 그 멍울이 터지고 말았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단순한 물의 울림이 아니다 K를 내 멍울 속에서 씻어내는 소리로 들린다. 비의 낙수(落水)는 그를 쫓아내는 계절의 발걸음이자, 여름의 끝자락을 씻어낸다. 서서히 물러나게 하는 발자국 소리로, 마음 속 울림이 되고 위안이 된다. 그 소리를 듣다 보면, 영화롭고 화려했던 날들을 무심히 흘려보낸 날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다가올 다른 계절을 맞이할 마음이 잔잔히 내리는 비로 은근히 고요해진다. 단지 내게 가물가물하게 퇴색된 미련을 따라간다. 지나간 일을 더듬는 일이 반복된 시간이 흐른다. 그것도 세월이 흘러갈수록 미련을 포기한 만큼 더욱 선명한 상처만 가슴에 남겠지만....
굳게 닫혀있는 낡은 철창의 파랑새는 창공을 날지못한다. 철창의 새같이 힘없이 늙어서 무능(無能)해지는 그 슬픔이 내 안 어딘가로 가라앉는다. 오늘같이 비내리는 날... 나를 견디게 할 맑은 소주에 변함없는 지기들과 함께 나를 지키고 위안을 받고싶은데, 가랑 가랑 내리는 비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내린다. 그러나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결국 계절을 밀어내고, 또 다른 계절을 초대하듯이 이 우울감을 밀어내주길 바란다. 이 비 속에서 여름의 뜨거웠던 열정과 가을의 오색찬란했던 영화와 서늘함이 교차하는 순간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였던 옛영화(榮華)를 회상하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철창(鐵窓)의 파랑새가 높고 푸른 하늘을 굼꾸며 새장을 벗어나 날아 갈 수 있듯이, 다시 비워두는 마음과 다시 믿는 마음을 이 비 속에 채운다. 다시 참는 마음과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이 슬픔이 내리는 비 속에서 한 잔의 맑은 술잔을 들어 올린다. 그 속에는 탁한 세상도, 번잡한 생각도 잠시 가라앉고 맑디맑은 한 줄기 빛처럼 고요함이 스며든다. 한 잔의 맑은 술은 삶의 무게를 견뎌낸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위로이자, 내일을 향한 다짐의 불씨가 된다.
- 2025년 9월 9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