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가 내쉬는 숨결

인생의 먼지가 스며 있다....

by 김중근

세월의 무게가 내쉬는 숨결


- 김 중 근


새파란 물감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이 맑고 푸른 날이지만, 홀로 부는 바람이 지옥의 불길보다 뜨거운 허망함을 더욱 세게 불사른다. X는 오늘같은 내일을 사느니 차라리 고층 건물의 옥상 꼭대기 위에 올라서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싶은 허무함을 느낀다. 좁은 방 안에선 시계 초침 소리만이 힘겹게 흘러간다. 낡은 의자 위에 앉은 X는 손 끝으로 헐어진 손잡이를 쓸어본다. 세월이 묻어 있는 손바닥, 그 골 깊은 주름 사이로 지나온 인생의 먼지가 스며 있다.


고희를 어느새 훌쩍 넘어선 황혼의 X는 바보처럼 남을 딛고 올라서거나 남의 것 빼앗을 줄 모르고 살았다. 잘난체하며 살기보다 대체로 낮추면서 살려고 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삶의 절반 이상을 저당잡힌채 숨죽이며 살았던 그다. 갈대가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듯이 목소리 큰 사람의 휘둘림 속에 산 그다. 마땅히 요구해야할 뜻도 조심스러워 숨 죽이며 살았고, 주위에 굴러다니는 대소사들을 잘 챙기며, 바보처럼 살았던 그다. 아직은 갈 길이 제법 남았는데 생활 터전은 날로 약해지고, 잡아줄 사람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없다. 사는 것이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지만, 스러저가는 그 자신을 누가 조금이라도 추스려준다면 한결 힘이 날텐데....허전한 마음 어느 한 곳도 둘 수 없는 X다.


도심(都心)에서 X의 종전 생활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적어도 금전적으로 쫒기며 살지는 않았다. 이곳 생활 초기만해도 늘 통장에 수 천여 만원의 현금이 있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던 그의 생활 규모였다. 그런데 어디서 부터 단추가 잘못 끼어진 것인지...젊은 날에는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눈초리와 어깨였건만, 이제는 하루하루 버티는 일조차 고된 X다. 각종 요금 고지서가 우체통에 쌓일 때마다, 세상은 그를 더 좁은 골방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언제 부터인가 그처럼 낭낭하던 그의 목소리가 애경사(哀慶事)등의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한숨부터 내돌리고 가슴을 쓸어 내리는 광경이 자주 목격된다. 통장은 조용히 텅텅 비어가는 그다. 그의 신음 소리가 고통을 가슴에 쓸어모은다. 그래도 명색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간부였다고 일체 아쉬운 소리 입밖에 내지 않고 살았던 X다. 평소 늘 고귀하게 품위를 지키던 그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고, 창밖 노을 속에 갇힌 석양을 본다. ‘버티고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란 말이 희미한 회상처럼 귓가를 맴돈다. 하지만 이제는 좋아질 날보다 하루하루를 끈질게 버텨야 할 날이 더 많을 그다. X의 한숨이 길게 흘러나온다. 그것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세월의 무게가 내쉬는 숨결이다. 누구나 행복해야할 권리가 있다고들 하지만 그가 잃은 생활 터전을 어느 누구로 부터 보상받아야 하는지.... 그는 답답한 심정일 뿐이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않더라도 하늘은 알고 계실 것으로.. X는 맺힌 화를 소주로 달랜다. 연일 계속되는 소줏잔은 그의 몸을 녹여낸다.


벌써 가을 잎의 색이 울긋불긋해진다. 나무는 이파리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X는 “하늘을 보며 눈이 시려 흘릴 눈물이 있기에 난 슬프지 않고, 내일이 있기에 나는 오늘 여유롭고 또한 넉넉하다“ 라고한 어느 시인의 말을 위로 삼는다.


X를 생각하며, 지금 난 초라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망연자실 지난 날을 안타까워 하기 보다 남은 날 내 마음 붙들고 희망이 넘치는 사람으로 살겠다.



- 2025년 10월 11일 추석 명절 연휴가 끝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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