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서(暴暑)

늦 여름의 계절을 씻어버리고....

by 김중근

폭 서(暴暑)



김 중 근


살며시 오는 가을은 언제나 다시 오기마련이지만 내 곁을 스치는 횡단 보도 위의 바람은 아직 열기로 뜨겁다, 해가 나오면서 거리는 벌써 부터 뜨겁다. 처서를 지나 백로(白露)인 오늘인데도 무더위가 짜증을 유발한다. 여름은 햇살의 강물이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쏟아지는 빛은 세상을 한순간에 끓어오르게 하고, 그 속에서 풀잎과 꽃, 작은 벌레들마저도 생기를 잃는다. 용광로 속에서 펄펄 끓는 열기 같이 온 대지를 태운 폭서였다. 그 속에서 생물들은 지친 호흡의 숨결을 내뱉는다. 매미의 울음은 하늘을 흔드는 종소리 같아, 낮의 뜨거움에 박자를 새겨 넣는다.


나뭇가지마다 채워진 폭염에 이파리가 빛을 바래고 더위에 힘겹다. 요란했던 한여름의 그 설레임과 활짝 피어났던 기쁨의 환희를 송두리째 보내고, 지난 밤 폭우(暴雨) 속에 가을 속으로 줄달음치는 여름의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슬슬 지나는 듯이 흐르는 계절에게 나는 그만 손을 흔들어 멈추게 하고 가을로 향한다. 그냥 들과 산으로 이어진 신비한 길, 그 자리에 데려다 달라고 소리친다. 생태계의 순환 속에 놓인 흐린 세월 속으로 한 계절이 매몰된다. 누군가 힘들고, 찜통 같은 삶의 궤도를 지나서 제 길 가는 그 여름이란 놈은 우리에게 짜증만 안겨준 폭염이었지만, 다행히 지난 밤에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치고 비가 거칠게 내려서 오랜 더위를 통쾌하게 식혀주었다.


한편 지난 뜨거운 바람은 폭염을 품고 왔지만, 그 안에는 여름만의 자유와 열정이 녹아있다. 바닷가 하얀 모래 위에 눕기만 해도 하늘과 구름은 한없이 꿈틀대고, 구름은 태양을 닮아 제멋대로 녹아 춤을 추며 흘러간다. 바다는 푸르른 심장을 열어젖히고, 부서지는 파도마다 한여름의 노래가 흩어진다. 여름은 또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피를 용솟음치게 하고 삶에 대한 정열로 열기를 더해 주었다. 넉넉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줄 아는 힘을 길러주기도 했다. 저편 넘어 휘돌아간 들과 산으로 이어진 신비한 길이 아직 보이지 않지만 건너편 가을이 오는 숲 속에서 건너오라 손짓한다. 그러나 해가 저물면 여름은 다른 빛깔로 다가온다. 노을이 붉게 번진 하늘은 하루의 열기를 잠재우고, 차츰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여름 밤은 낮의 뜨거움을 잊게 하고, 마음을 은은하게 감싸며 오래도록 머문다.


여름은 한순간을 태워내며, 동시에 영원히 남는 계절이다. 그렇지만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제길 가고 있는 여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제 원망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폭서의 계절이 매몰되고 있는 내 마음에는 가을날의 부풀었던 그 설레임처럼 꿈은 여전히 살아 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은 그대로 삶이 되고 희망이 된다. 삶이 어지롭고 맑지 못할 때도 꿈은 그대로 삶의 지탱이 되고 파랑새가 된다. 뜨거움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눈부신지를 배운다. 비록 한 여름의 열기로 잠못 이루는 밤일지언정 살아 있는 동안 꿈을 꾸어 화들짝 피어났던 가을의 향연처럼 성숙함을 맛 보겠다. 서둘러 여름 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꿈을 꾸며 가을을 맞이하겠다.


휘어진 골짜기를 빠지는 산 울음 소리가 들린다. 평생을 떠돌던 고독도 꿈에 묻고 그 서글픔을 꿈에서 풀겠다. 휘청 굽이친 금강 줄기에 매몰된 늦 여름의 계절을 씻어버리고 이제 산 따라 물 따라 오는 가을을 맞으러 가겠다.



- 2025년 9월 7일 폭우가 내린

한여름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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