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간.....
설 날
김중근
전면창으로 투시된 아침 하늘은 뿌옇다. 안갯속에 섞인 초미세먼지가 자욱해서, 건너편 서천군 한산면 JSA, 촬영 현장의 윤곽은 희미한 수묵화처럼 번져있다. 멀리 있어야 할 산도, 눈앞 가까이에 있는 마을도, 모두 안갯속에 잠긴 듯 흐릿하다.
요즘의 세상도 그와 닮았다. 뉴스를 켜면 경제는 팍팍하다 하고, 정치는 갈라진 목소리로 진영 논리에 갇혀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다. 장바구니 물가는 가볍지 않고, 월급 봉투는 늘 제자리인 듯하다.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미세먼지 가득한 거리처럼 답답하게 가라앉는다. 그런 가운데 설 연휴가 다가온다. 달력 속 빨간 숫자 몇 개가 유난히 또렷하다. 뿌연 공기 속에서도 그 날짜만큼은 선명하게 빛난다.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번 설에 내려갈게요” 하고 말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작은 등불이 켜진다. 각박한 세월 속에서도 설이 되면 고향으로 향하는 이유는, 설은 단지 한 해의 시작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설날 아침은 밤새 묵은 해가 눈처럼 소리 없이 물러나고 동쪽 창문 틈으로 새해가 희망으로 찬란한 빛을 내려주면서, 아침 밥상은 떡국을 먹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떡국의 가래 떡은 길고 하얗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에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흰 떡은 맑고 깨끗한 새해를 뜻하고, 길게 뽑은 가래떡은 오래도록 이어질 복을 상징한다. 그래서 우리는 떡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복과 장수를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된다. 세상이 아무리 탁해도, 떡살은 하얗고 그 국물만큼은 맑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뜰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자”, “하는 일 마다 뜻대로 잘 되길 바란다”는 덕담이 자연스레 오가게된다. 떡국 한 숟가락을 뜨며 우리는 또 한 살을 먹는다. 나이가 한 살 더해지는 만큼 책임도, 걱정도 늘어나지만 그와 함께 희망도 조금씩 자란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어른들의 한숨을 덜어내고, 어른들의 덕담은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준다. 그 흔한 인사말이 올해는 유난히 간절하기만 하다. 큰절을 올리는 아이의 이마에 햇살이 내려앉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박또박 건네는 한마디가 얼어 있던 어른들의 마음을 봄물처럼 녹인다. 세뱃돈 봉투 속에 지폐보다 먼저 사랑이 접혀 있고 어른들의 웃음 속에 지난 세월의 눈물과 고마움이 함께 빛나게 된다. 요즘은 예전처럼 밤을 새우지도, 마루 끝 디딤돌에 놓인 신발을 훔쳐 간다는 전설 속의 ‘야광귀’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족이 모여 앉아 옛이야기 하나 꺼내 놓는 순간, 시간은 잠시 느려진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이고, 어른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설날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가족들 간, 이웃간에 정과 정 사이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가교가 된다. 설날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초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 아래서도 우리는 안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힘 들더라도, 여전히 구름 위에 해가 떠 있다는 것을... 경제가 어렵고, 정세가 혼란스럽고, 세상이 안갯속을 헤매는 듯 보여도, 설날은 분염하게 우리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설날에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월급이 조금 오르길, 장바구니가 조금은 가벼워지길, 정치꾼들은 일방통행 속에서 싸움질만 일 삼지말고 우리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길, 뉴스 속 갈등이 조금은 잦아들길,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아프지 않고 무사 안녕하길 바랄 뿐이다. 미세먼지와 안갯속에서도, 그것을 위해 사람은 길을 찾는다. 손을 서로 맞잡으면 방향을 잃지 않을 텐데...서로 반목해서 갈 길을 헤멘다. 안타깝다. 설은 그 손을 다시 맞잡는 날로써 절호의 기회다. 가족간, 이웃 간 서로의 반목을 푸는 날이다. 비록 하늘은 흐리고 안개와 미세 먼지로 가득해도 식탁 위 웃음은 또렷하고, 덕담은 따뜻할 수 밖에 없다. 그 온기가 모여 언젠가는 미세먼지와 이 안개도 걷히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 설은, 그래서 희망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해마다 설은 늘 우리를 같은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설날은 가장 한국적인 숨결로 가장 따뜻한 이름이다.
마당 끝 매화 가지에 걸린 바람이 잠시 머물다 미세먼지를 깨끗이 몰아낼 것이다. 미세먼지와 안개가 물러난 올 설날의 하늘은 유난히 높아 우리의 소망을 넉넉히 받아줄 것이다. 설날은 나이를 더하는 날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니 우리 모두 힘내자!
2026년 1월 13일 미세먼지와 안개가 자욱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