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

생각이 서성이는 어느 봄의 길목에서...

by 김중근

상념(想念)

- 김 중 근

겨울 끝자락에 매달린 생각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밤새 뒤척이며 피워 올린 이런저런 생각들,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막연한 염려, 괜히 살아난 오래된 기억의 그림자들이 방 안 공기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다. 머릿속은 아직 눈 녹지 않은 들판인데도, 창밖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봄이 꼼지락거리며 다가온다. 일흔을 훌쩍 넘긴 봄은 젊은 날의 봄과 다르다. 한때는 꽃이 피는 것이 기쁨의 전부였고, 바람이 불면 설렘이 먼저였다. 그러나 이제는 꽃이 피기까지의 혹독했던 겨울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한파를 견뎌 낸 시간의 무게가 한철의 시련 만큼 꽃잎의 결을 더 또렷하게 보이게 한다.

창가에 앉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생각들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 깊은 데서 올라온다.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연둣빛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봄을 맞는 미풍의 바람은 겨우내 굳어 있던 가지를 흔들어,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 모든 것을 놓고 이제 그만 놓아도 된다고 속삭이는 듯 하다. 횟수로 치면 이미 많은 계절과 꽃을 보내고 많은 이파리를 피워낸 사람일게다. 젊은 날의 봄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묻는 계절이었고, 중년의 봄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고민하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봄은 다르다. 내 안의 생각들은 여전히 소란스럽지만 봄의 기운은 묻지않는다. 왜 그토록 복잡하냐고, 지나온 선택들, 붙잡지 못한 인연들,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얼굴들. 그 생각들은 마치 들판에 내린 늦은 서리처럼, 봄이 오는 길목에 서있는 내게 문득 내려앉는다. 햇살 한 줌을 내어주며 마른 흙을 데우듯 조용히 마음을 덥힌다.

일흔 중반을 넘긴 내가 여전히 봄을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혹 누군가에게는 작은 등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흔 중반의 마음은 안다. 서리가 내려도 뿌리까지 얼어붙지는 않는다는 것을... 꽃을 피우는 봄이 청춘만의 특권이 아니기에, 념과 불면을 녹여 온 산과 들에 푸르름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마음의 온기도 나이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흩날리는 미풍의 바람을 느끼며 비로소 깨닫는다. 이 오는 봄이 아직도 따뜻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 줄 것 이라는 믿음이 크다. 젊은 시절의 봄은 앞을 향한 환희라면, 이 나이의 봄은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잔잔한 물결이라는 것을... 인생은 꽃이 피는 날보다 꽃이 진 뒤에도 햇살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겨울에 자리 잡았던 감성적인 생각들은 따뜻해진 흙 위에서 힘을 잃고, 스스로 부끄러운 그림자처럼 봄의 기운이 돌면서 서서히 핀다. 그 자리에 이유 없이 웃고 싶은 순간이 돋아난다. 아무 근거도 없이 괜찮을 것 같은 예감이 싹튼다. 황혼의 봄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계절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들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계절이 된다. 많은 생각들이 또한 이제는 몰아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동반하면서 숙성되는 벗처럼 느껴진다. 그것들이 있었기에 오늘 여기까지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이의 봄은 요란하지 않다. 다만 고요히, 분명하게 연둣빛 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팔팔하잖아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라고... 희망이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빙토에서 새 생명이 움트는 것 같이 하루를 다시 시작해 보는 작은 용기라는 것을... 그늘에서 힘없이 사는 이에게 말해 주고 싶다. 앞날이 막막해 보일 때, 혹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 희망으로 올라오는 새 싹같이 봄을 믿으라고... 봄은 누구에게나 가능성으로 오고, 지친 사람에게는 위로로 오며, 늙은 사람에게는 “잘 견뎌왔다”고 어깨를 두드리며 온다는 것을...안다. 봄은 젊음의 계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의 현재형이라는 것을. 늦은 나이에도 설렘은 봄과 같이 다시 올 수 있고, 새 생명이 쑥쑥 올라 오듯, 희망은 살아있다. 봄은 곧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도, 나도, 아직 봄 한가운데에 있다, 아직 팔팔하니 괜찮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희망이고 용기였다“ 라고...

봄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복잡한 생각보다 먼저 살아야 할 이유를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피워 올릴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어지로운 생각은 겨울처럼 가혹하고 길 수 있어도, 봄의 햇살로 생각을 한 꺼풀 두 꺼풀 벗겨 낼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봄은 어김없이 당신이나 나나, 누구에게나 문을 두드림을 믿어라!

-2026년 3월 1일, 어느 봄의 길목에서....


작가의 이전글설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