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보내온 첫 서신...
봄을 맞는 정월 대보름
- 김 중 근
봄은 다시 온다. 하늘은 유난히 깊고 맑아, 세월의 먼지까지 씻어낸 듯하다. 골목 담장 아래에서 작은 풀잎들이 연둣빛 숨을 고르고, 나뭇가지 끝에는 보이지 않던 기척이 돋아난다. 오늘 정월 대보름날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맑다. 햇살은 환하게 퍼지며 겨우내 얼어있던 마음의 살결을 녹인다. 여기저기 아직 마른 누런 풀빛이 남아 있지만, 그 곳에서 이미 연둣빛 기척이 꿈틀거린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세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희망으로 은근히 분주하다. 그것은 소리 없는 향연의 예행 연습과 같다. 그리고 오늘, 3월 3일 정월 대보름이다. 어제의 비가 겨울의 마지막 인사였다면, 오늘의 하늘은 봄이 보내온 첫 서신이다.
잠결에 눈에 들어온 시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이틀간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용마루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마치 겨울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미련처럼 느리게, 또 집요하게 땅을 적셨다. 잿빛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세상을 잠시 숨 고르게 하더니, 마을 골목 어귀마다 젖은 흙냄새와 봄바람의 향을 남겨 두었다. 밤새 씻긴 하늘은 유리처럼 맑고, 어제의 빗방울이 상념의 씨앗이었다면, 오늘의 햇빛은 수정같이 투명해서 마치 대지를 깨우고 어루만지는 손길같기만 하다. 잠자는 공주가 오래 잠들었다가 이제 막 눈을 뜬 듯, 고요한 숨결로 대지를 흔들어 깨운다, 바깥 공기는 아직 겨울의 서늘함이 남아 있지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 봄의 온기가 섞여 있다. 어제의 비가 지나간 자리 위로, 남녘에서 올라온 화신이 은은히 숨을 고른다. 매화는 아직 모두 피지 않았으나 향기로 먼저 길을 내고, 남쪽 산동면 산수유의 노란 숨결이 보이는 듯 어른거린다. 그 향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마음에 먼저 닿는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지고, 얼굴에는 이유없는 미소가 번진다. 계절은 이렇게 말없이 사람의 마음부터 바꾸는 모양이다.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와 햇살 사이를 스치듯 지나며 건너오고 있었다.
봄이 오는 그 길목에 서 본다. 젊은 날의 화려함은 바람에 맡기고, 이제는 은은한 빛으로 서서 그 빛을 온 몸으로 맞이 해본다, 한순간의 미소는 오래 견딘 시간의 향기를 내뿜는다. 봄꽃이 가지 끝에서 피어난다면, 내가 살았던 생의 아름다움은 가지를 뻗고 피어난 꽃같이 순간순간 피어오른다. 지나온 계절의 결을 따라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난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매화처럼, 미소는 절제되어 흐른다. 꽃은 가지 끝에서 피어나지만, 사람의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먼저 피어난다는 것을, 봄은 그렇게 보여준다. 그러나 황혼의 봄은 다르다. 조급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다. 꽃이 피는 속도를 재촉하지 않고, 다만 바람이 스치는 시간을 음미하게 된다. 봄꽃이 한 철 피고 지는 것과 달리, 사람은 여러 계절을 지나며 겪었던 기쁨과 슬픔 등이 교차하면서 겪었던 마음의 두께를 잘 다듬게 된다. 더욱 단단하게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한창 피어오르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깊은 향기를 품을 수 있는 천년송같이 깊은 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대보름의 둥근 달은 오늘 밤이 되면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 환한 달빛 아래에서 겨울의 그림자는 한 겹 더 옅어지고, 산야(山野)와 마을은 은은한 달빛으로 물들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문턱에서 달은 빛조차도 온기를 띠는 법이다. 달은 하늘의 꽃이고, 꽃은 땅의 달이라 했던가. 대보름의 둥근 달을 떠올리면, 어제의 비 또한 헛되지 않았음을 알 것 같다. 비는 묵은 먼지를 씻어냈다. 겨울이 물러가는 자리마다 봄은 조용히 자리를 펴고 앉는다. 성급하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다만 확실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봄을 담아 솟아오른다. 우리의 희망이 솟아 오르듯 정월 대보름달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오늘이다. 둥글게 떠오르면, 우리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본다. 젊은 날에는 소원을 빌기 위해 달을 올려다보았다면, 이제는 감사와 염원을 담아 달을 맞는다. 그 둥근 빛은 우리 삶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준 시간의 얼굴 같다. 깎이고 닳아 마침내 원만해진 마음처럼, 달은 말없이 환하다.
나는 그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기원한다.
남은 날들이 겨우내 모가 났던 마음이 저 달처럼 환하고 원만하게 둥글기를!...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이 저 달빛을 받아 온전히 열리기를!... 그리고 이 봄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의 삶에도 햇살을 받으며 환한 향연이 펼쳐지기를!... 우리의 봄이 화려하지 않아도 좋으니, 향기만은 오래 남기를!... 기도하겠다.
2026년 3월 3일, 정월 대보름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