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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입춘이라네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81

by 태화강고래

내 마음이 여유롭고, 푸근하니 세상도 그렇게 보였다.


절기상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 여느 때보다 포근한 날씨가 나를 흔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가봤다. 선물로 받은 기프티콘을 들고 커피 한 잔 하자며 딸과 남편을 앞세워 들어갔다. 학원가에 위치한 1층 스타벅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통창에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테이블, 푹신한 소파가 놓인 테이블, 스터디용 널찍한 테이블, 일반 테이블까지 다양했다. 자리를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콘센트가 있는 테이블 근처에서 맥북을 보는 젊은 여성들, 널찍한 테이블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나란히 앉아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부부, 대화를 나누는 부부와 곁에서 파란색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 패드를 보는 유치원생, 친구로 보이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한편에 우리 셋이 앉았다. 주말 스타벅스 2층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운 좋게 소파자리를 잡은 우리도 등을 기대고 셋이 일렬로 앉아 각자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스마트폰을 보다가 가끔 딸과 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딸은 스케치북이라는 앱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설명하며 나를 가르친다는 기쁨에 흥이 들어갔다. 다들 편안해 보였다. 오래간만에 나도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 맛보다 분위기에 취해 쉼을 누렸다. 폭발적인 수다로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없어 진정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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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밖으로 나왔으니 순순히 둘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파스텔 하늘에 흰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탄천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유히 발로 헤엄치는 오리를 보며 한 번 웃고, 우리의 발걸음을 오리발과 맞춰봤다. 놀랍게도, 우리의 빠른 걸음보다 오리의 발짓이 더 빨랐다. 깔깔 웃었다. 추운 날씨에 패딩모자를 뒤집어쓰고 장갑 끼고 혼자 걷던 길이 오늘은 춥지 않았다. 어느새 2월이 되어, 봄이 오고 있었다.


추운 날, 혼자 걸을 때 물에서 헤엄치는 오리는 외톨이처럼 쓸쓸해 보였다.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나를 비추었다. 며칠 전 봤던 똑같은 행동을 하는 오리가 오늘따라 여유롭고 평안해 보였다. 공원 나뭇가지에 앉은 비둘기도 그랬다. 주말이니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내 눈앞에서 관찰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평화로운 순간들만 보일 뿐이다. 마음의 눈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인용구가 떠올랐다.


입춘. 봄이 다가오고 있다. 내 인생의 47번째 봄이 발을 떼고 있다. 5년 전 암을 선고받고 절망과 우울로 벚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던 그 봄은 고통스러웠지만 어느새 저만치 가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찬란한 봄이 다가오는 중이다.




생의 계단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에서


모든 꽃이 시들듯이

청춘의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넗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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