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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손님 앞에서 작아졌습니다.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86

by 태화강고래

설날.


서울 시댁에 도착했다. 역시나 어머니는 점심상 준비를 거의 마치신 듯했다. 말씀하셨듯이 떡국과 뭇국이다.

얼른 어머니 옆으로 가서 불고기를 프라이팬에 볶기 시작하자 압력밥솥에 흰쌀을 넣으셨다. 아이들을 생각해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잡곡 대신 100프로 쌀로만 밥을 지으신다.


"떡국 먹을 사람은 떡국을 먹고, 밥 먹고 싶은 사람은 밥 먹게 하자."


시누이네 식구들의 선택이 자신 없으신 어머니는 늘 그렇듯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셨다. 부모님, 우리 식구 4명, 시누이네 식구 4명으로 총 10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장이시고, 난 보조였다. 밥과 떡국의 계량도 이미 다 해놓으신 터라 난 별생각 없이 볶고, 뒤집고, 끓이는 일에만 신경 썼다.


"10분 뒤에 아가씨 도착한다는 톡이 왔으니 이제 떡국 끓여도 되겠어요."


그렇게 떡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뽀얀 육수에 떡을 넣고 보글보글 끓였다. 간을 하고, 소고기 고명을 듬뿍, 자른 김도 올려 어머니표 떡국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를 때쯤, 아가씨네가 도착했다. 같은 아파트서 살지만 서로 바빠 보기 힘든 조카들을 추석 이후 다시 만났다. 고 2, 중 2 아들과 우리 집 중1 아들, 초 5 딸이 모여 거실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쑥쑥 커가는 사춘기 남자애들의 키가 168센티 이상이고, 무채색 옷을 입어 서도 앉아도 꽉 찬 곳에 노란색 맨투맨티에 긴 생머리를 한 딸이 작고 귀여웠다. 오빠들 속에 끼여 같이 게임을 하는 건 익숙하다. 애들도 그간 못 만난 정을 나누듯 게임에 열을 올렸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늙어가는 중년부부와 노부부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듯 남다른 생명력이 팍팍 느껴진다. 어울려 노는 아이들로 집안 분위기는 시끌벅적 방방 뛰었다.


뿌듯, 활기찬 분위기를 배경으로 식사를 차려냈다. 부지런히 식탁과 거실 바닥에 놓인 상위에 떡국팀을 위한 떡국과 흰쌀밥팀을 위한 국과 밥, 반찬을 올렸다. 10인분이 완성되었다. 각자 자리에 앉았다.


"저 떡국 먹을 건데."

"저도요."

"난 밥"


밥을 원한 건 시누이네 작은 아들뿐. 모두가 설날엔 떡국이지라며 떡국을 원했다.

그런데...


"떡국은 6그릇뿐이야. 밥 먹어들."

그러고 나서 다시 들려오는 소리.


"밥 주세요."

"저도요."

"거기 밥 없어?"

"엄마, 나도 밥."


여기저기 오랜만에 밥타령을 했지만, 오늘따라 밥이 부족했다.

갑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얼어버렸다. 오늘따라 조카들이 밥을 두 공기씩을 먹어버렸다. 오늘따라 계량을 너무 정확하게, 여유 없이 해버렸던 것이다.

사위의 얼굴부터 보셨다. 딸은 그렇다 쳐도, 어쩌다 오는 사위에게 너무 민망하신 어머니는 고개를 못 드셨다. 사위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부족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내가 설거지하는 내내 옆에서 정리를 하시는 어머니는 자책을 멈추지 않으셨다.


"애들이 커버린 것을, 많이 먹는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사위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럴 수도 있죠. 너무 신경 쓰시면 안 그래도 잠을 못 주무시는데 오늘밤 잠 못 주무세요."


아무리 위로의 말을 드려도 계속 되풀이하셨다. 시누이네가 먼저 가고 우리는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했다.

다시 차린 상위에 밥이,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밥이 놓여있자, 어머니의 눈은 또 그 밥에 머물렀다.


"아까는 부족한 그 밥이, 지금은 또 남네... 아이고..."

"저도 밥만 보이네요. 참..."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식과 손자손녀, 사위와 며느리까지 모두가 모인 설날 식사를 책임진 어머니의 책임감의 무게는 너무도 컸다. 그동안 별로 내색을 안 하셨던 그 무게가 오늘 사위 앞에서 안 그래도 왜소한 어머니를 짓눌러 더 작게 만들었다. 음식을 준비하신 시간과 노고는 어디로 갔는지. 그저 부족한 밥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 웃으며 넘기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래도록 기억될 그런 설날 점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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