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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으로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89

by 태화강고래

아들의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꺼내 자습서를 구입할 생각으로 출판사를 확인했다. 공동 저자의 이름을 눈으로 스캔하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흔치 않은 이름으로 내 기억 속 그분의 이름과 같았다. 혹시나 궁금해서 책 뒷장을 펴서 확인해 보니 그분이 맞는 거 같았고, 한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얼른 네이버 검색버튼을 눌렀더니... 역시나 그분이셨다. 오랜만에 보는 그분...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 지금은 서울소재 대학교 교수님으로 재직 중이셨다. 반가웠다. 프로필 사진 속 모습은 30여 년이라는 세월을 비켜간 듯 변함이 없으셨다. 나 혼자 나이를 다 먹었나 싶을 정도였다.


당시 선생님은 여고생들의 로망이던 총각선생님으로 대학원 졸업 후 우리 학교에 오셨다. 유일한 총각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전교생 900명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셨다. 당시 1994년 개봉한 영화 <스피드>로 잘 알려진 키아누 리브스와 약간 닮은 외모 또한 인기를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되셨다.


그 넘의 인기가 식을 줄 몰라 쉬는 시간에도 선후배동기 가릴 것 없이 선생님을 찾아와 간식과 작은 선물을 드렸고 가끔 교무실에 들르면 그때도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전교생의 팬클럽화 분위기에 휩싸인 듯, 나 또한 겉으로 내색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선생님을 좋아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연예인 같은 분이셨다. 선생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영어 수업 시간에 발표도 자발적으로 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30대 초반 젊은 담임선생님은 말장난을 하며 편하게 반 친구들과 티격태격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약간 허스키 목소리에 영어 발음은 보통이셨는데, 지나고 보니 뭘 배웠는지 크게 기억에 남는 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놀고 싸웠던 장면들만이 띄엄띄엄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만우절에 책상을 반대로 배치해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고, 운동장에 "선생님, 사랑해요!"를 심심치 않게 쓰는 등 선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당번인 야간 자율학습날이 되면,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학교 밖을 나갔다가 선생님께 야단맞고 맞짱 뜨는 친구들이 있었다. 사춘기 여학생을 다루는 경험이 부족한 선생님과 만만하게 보는 학생들의 대립은 나를 비롯한 친구들을 많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후 희망직업란에 교사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바람 잘 날 없이 2학년은 지나갔고, 3학년땐 돌부처 같은 무표정의 40대 후반 남자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다. 우리 반 때문에 너무 힘드셨는지 아님, 다른 사정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떠나셨다.


그리고 가끔 소식이 궁금했지만, 아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미혼인 여선생님과 사귀었다는 소문, 졸업생과 사귄다는 소문 등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만 가끔 들렸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들의 교과서 덕분에 교수님이 되신 걸 알게 되었다.


"선생님, 제가 고 2 때 OOO입니다."라고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기억도 못하실 눈에 띄지 않은 학생이었지만, 브런치에라도 글을 남기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다.

그때 저도 서글서글한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다투고 화는 내시지만 힘들어하실 때 안타까웠습니다. 교수님이 되시기 전에 저희를 잠깐 만나셨는지, 아님 저희 때문에 교수님이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으로 살고 계셨네요. 오늘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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