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년을 재발 없이 무탈하게 보낸 졸업식날이라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글을 안 쓸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엄마에게. 남편에게. 울산에서 방사선치료를 받다 만난 엄마뻘되는 분에게도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했다.
2019년 3월 8일.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울산으로 이사 가고 며칠 뒤 어수선한 새 학기를 맞으며 새벽기차를 타고 분당으로 올라와 혼자 울던 그날.
병원 의자 한쪽에 앉아 멍하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막막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떻게 내가? 암을 이겨낼 수 있을까?
굽이 굽이 흘러가는 인생에서 통과하는 터널 중 가장 힘들었던 터널을 막 벗어났다. 지난 5년의 시간을 다시 되돌아가서 살라면 기꺼이 살 수 있을까? 인생에서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겠지만, 암경험은 선뜻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미화해서 부연설명을 갖다 붙인다 해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라고 감히 말해 주고 싶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뒤끝도 있다. 한번 통과했으니 깨끗하게 뒤돌아볼 필요가 없는 그런 터널이 아니며, 그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약해진 몸과 마음을 토닥토닥 살피는 것과 동시에 언제 또 만날지 모르기에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아 죽는 날까지 신경 스위치를 꺼놓고 만사태평하게 지낼 터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삶을 대하는 자세는 긍정적으로 달라졌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양양 여행 중 인제양양터널을 지나면서 놀라고 또 놀랐다. 총길이 11km에 공사기간이 2009년 6월부터 2017년 6월까지로 상당히 길었다. 국내 최장, 세계에서도 11번째로 길 터널이라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터널에 답답했지만, 운전자를 배려한 조치로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출구까지 몇 킬로 미터가 남아있다는 안내등, 사고방지를 위해 무지개나 그림을 나타낸 화려한 LED조명, 터널 안 실선 차선과 달리 차로 변경 등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한 점선 차선이 눈에 띄었다. 이런 도움을 받아 운전자가 할 일은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 절대 멈추면 안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터널을 비추는 조명에 의지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멈추면 사고가 난다. 내 삶의 운전대를 꼭 잡고 액셀을 밟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아침에 눈뜨고 밤에 잘 때까지 계속 몸과 마음을 움직인 덕분이다. 어두운 터널에서 절망과 우울에 빠져 멈춰버리지 않도록 애써준 주위의 도움도 컸다. 겨우 벗어났다. 터널을 통과해서 빛을 보게 되니 일상의 소소한 감사함이 배가 되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행복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졌다. 건강한 생활습관도 자리를 굳혀 또 닥칠지 모를 터널 앞에 겸손하며 성실하게 전보다는 무던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변신 중이다.
오늘도 진료실 옆방 침대에 누워 대기 중인 내 귀에는 이제 막 암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고 표준치료라는 문 입구에 선 젊은 여성이 힘없이 띄엄띄엄 묻는 말이 들린다.
삼중음성은 위험한 거 아네요?
꼭 그런건만은 아닙니다.
항암을 먼저 해야 하는데 대기가 기나요?
종양내과에서 상담하고 오세요.
파업이라 오래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암이 커지고 있는 거 같은데. 딴 병원서 항암하고 와도 예약 잘 잡아주나요?
우리 병원에서 항암 한 환자 우선으로 합니다. 어디 가나 파업상황은 비슷할 겁니다.
듣고 있어도 마음이 짠했다. 하필 파업일 때 아프니 안 그래도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얼마나 다급할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해 얼마나 답답할까? 왜 의사는 좀 더 따뜻하게 말해 주지 못할까? 유방암 신입생부터 졸업생까지 모든 학년을 대하는 의사는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도 같다. 5년 동안 변함없이 오늘도 의사는 단어를 셀 정도로 말수가 적다.
역시 덤덤하게 지나치듯, 담당의는 "MRI 결과는 깨끗하고, 5년이네요."라고 말한다. 검사결과를 듣고 혼자 기쁜 마음으로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5년 무사통과다. 끝이 아니라 후반전 시작의 느낌이 들었다. 6개월 뒤 초음파를 예약하며 변함없이 이어지는 추적검사에, 재발이 가장 많은 유방암 환자임을 자각한다. 그래도 일단락은 마무리했다. 그러니 기뻐하자고 속으로 말하는데, 아까 그 환자인 듯 보이는 여성이 같이 온 가족에게 진료실에서 의사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을 속상해했다. 내가 직접 해 줄 수는 없고, 내 코도 석자지만, 마음속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두려울 겁니다. 그래도 닥쳐올 고통에 미리 겁먹고 쓰러지지 말고, 하루하루 살아 내세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조금씩 단단해집니다. 암은 싸워서 없앨 수 있는 적이 아니라,
길들여 데리고 함께 가야 한다고 합니다. 힘내세요. 주변에도 도움을 요청하세요.
저도 5년은 지났지만, 사는 동안 계속 건강한 습관을 유지하며 살아갈 겁니다.'
글을 쓰다 보니 그저 기쁨만으로 가득한 하루는 아니었나 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삼원색의 다이어그램처럼 겹쳐진 하루였다. 그래도, 그래도, 감사하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