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09
특히 장녀로 산다는 건
부모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을 한 해 두 해, 아니 하루하루 살면서 느끼기 시작했다.
올해로 13년이 되었다.
웃는 일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을. 예민하고 엄마에 대한 책임감이 유독 강해서 과할 정도로 혼자 힘들어하는지도 모른다. 일이라도 터지면 수습될 때까지 힘들다. 부모가 되어 자식의 보호자로 사는 건 당연하게 여기면서 켜켜이 내 속에 쌓인 사랑을 돌려드리는 건 쉽지 않다.
엄마는 엄마가 된 후 자신의 인생을 돌봄 제공자로 사셨다. 철들기 전부터 내 눈에 비친 엄마는 항상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식과 남편만을 챙겼다. 그런 엄마가 하루아침에 뇌출혈 환자가 되면서 환갑 이후에는 챙김을 받아야만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만큼 했으니 이제 도움을 받고 살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처량하다.
아픈 부모를 돌보는 건, 아니 아픈 누군가를 보는 건 쉽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게 부끄럽지만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면 좀 수월할 수도 있으련만, 항상 돈이 많았으면 하고 한탄만 할 뿐 특별한 대책은 없다. 삼 남매가 가정을 꾸려 살고 있으니 각자 뻔한 소득에 뻔한 지출로 매달 버티고 있다. 부모가 남겨놓은 삼 남매가 있어 분담하니 그나마 다행이다가도, 계산적인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날 때면 아쉽고 속상하기까지 하다. 곁에서 일거수일투족 간섭하고 챙기는 자식이 아니면 같은 자식이라도 모르거나, 모른 척 넘어가기 일쑤다. 잠시 들러 용돈 주고 가는 자식이 어찌 함께 사는 자식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나도 집에서 모시지 못하고 요양병원에 모시는 처지라 100프로 떳떳하지는 못하나 곁에 있는 자식은 맞다.
요양병원에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무슨 일일까? 넘어지셨나? 아프신가? 수신버튼을 누르기 전 1,2초 동안 머릿속은 이런저런 시나리오가 떠오르며 하얘진다. 그러다가 땅속으로 꺼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호자로 저장된 나에게 항상 전화가 온다. 엄마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나에게로 쏠리고 동생들과 의견을 나누고, 보통 속마음은 어쩔지 몰라도 내 의견을 따른다. 별일 없이 오후를 맞이하겠거니 하고 혈액종양내과에서 항호르몬제 6개월치 약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트 생선코너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있는 병원이었다.
요양병원 곳곳이 코로나로 인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문을 닫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도, 병원에서도 심심찮게 듣는다. 처음 입소 당시, 그러니까 7년 전에는 7개 층을 운영하던 병원이 점차 규모를 축소하더니 이번에도 한 층을 정리한다는 사정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엄마병실을 다른 층으로 옮겨야 하니 알고 있으라고 했다. 눈앞이 또 캄캄해졌다. 공동간병실에서 겨우 독립병실로 옮겨 간병비를 아끼게 되어 자식들 얼굴을 당당하게 볼 수 있다고 한 지 겨우 두 달 지났는데, 또 바꾸라니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옮기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신경이 날카롭고 긴장해서 병날게 뻔했다. 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창 코로나로 전 세계가 들썩이던 때 마침 병실 이동을 요구받자, 간병비 아끼겠다고 무리해서 독립병실로 옮겼다가 부적응에 휠체어 낙상으로 1년 넘게 고생했다. 그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내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왔다.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병원관계자를 만나 사정이라도 해 볼 작정으로 택시를 타고 집을 나섰다. 가장 가까이 살고, 장녀니까, 보호 자니까, 총대 메고 그간의 친분을 이용해서라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병원이 왠지 어수선해 보였지만, 다행히 병원관계자를 쉽게 만났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는 모범생으로 잘 지냈고, 나 또한 인사를 건네며 관계를 잘 맺어왔다. 그 덕분에 오늘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구슬프게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말만 나왔다.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사정하려고 찾아갔다. 병원 사정을 한참 설명하시더니만, 갑자기 방안이 떠올랐다고 기쁘게 말씀해 주셨다. 본인도 본인이 갑자기 생각해 낸 해결책에 만족해하셨다. 손을 맞잡고 이곳 관계자들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흐르는 눈물 콧물에 주책스러웠지만, 부끄러움은 뒤로하고 찾아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돌아섰다. 그렇게 나의 오후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다 평온해졌다. 어떤 후폭풍이 기다릴지 모르나 일단 무사했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으로 보호자의 무게를 나눌 수 있다. 근원적인 무게는 변함없을지라도 상황 속의 무게를 나눌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를 동생같이 여겨주는 그분이 참 고마웠다. 내 처지를 아는지라 엄마 걱정은 그만하고 몸 관리에 신경 쓰라고 몇 번이나 따뜻하게 용기를 주셨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는 모르겠다. 집 없는 설움에 이곳저곳 떠도는 사람들처럼, 엄마도 그렇다. 곧 다음 집을 내가 정해야 할 때가 올 테니 그 또한 부담스럽다. 어느 부모밑에 태어나 성장하는가가 인생을 결정하듯, 어느 자식밑에서 노후를 보내느냐가 중요하기에 그 무게를 벗어날 수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엄마딸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 "네가 먼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을 꼭 한다. 그게 전부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필요하다는.... 엄마가 살기 위해 딸인 내가 필요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