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여행기 6
세월의 흐름을 반영한 듯, 그대로 나이 들어간 건물과 새로 생긴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이든, 하와이든, 문과의 영광은 옛말인 듯, 낡고 부식된 건물이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어 안타까웠다. 영문과 교수진도 20 여전 전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는 소식도 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와이에 도착해 교수님과 이민사 연구선생님을 뵈었다. 두 분 다 하와이의 변함없는 풍경처럼, 70대와 80대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본인들의 업에 충실히 매진하고 계셨다. 한국계 미국인 게리 박 교수님은 입학을 시작으로 졸업 후에도 살뜰히 나를 챙겨주시는 분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졸업 후 처음으로 하와이에서 직접 뵈니 감회가 새로웠다. 코로나 전까지 1년에 한 번씩 한국에서 뵐 때와는 다른 기분에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출판의 기회가 있었으나 육아와 집안 사정으로 미뤄둔 내 졸업논문을 지금이라도 손질해 보자는 제안에 감사했다. '그때 마무리 지었으면 지금까지 미련이 없었을까? 또 다른 기회가 열렸을까?' 지나고 후회해 소용없는 감정에 잠깐 머물다 나와 교수님이 제안하신 것을 마침표를 찍는 퍼포먼스로 마무리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이민사 연구선생님은 이제 이민사 연구분야에서 꽤 유명인이 되셨다. 처음 뵀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외모와 열정에 80대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았다.
"you는 이 분야 개척자였잖아. 하다 말아서 지금 job이 없지, 관련된 경력이 없잖아.
애들 데리고 와서 여기서 박사해. 그래야 될 거 같네."
너무도 직설적으로, 사실적으로 아픈 데를 꼭 집어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었다. 남도 알고,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현실인데.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하와이로 왔다. 뻔한 조언일 수밖에 없는 3자의 조언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자리에서 꾸준히, 열심히 한 사람을 이길 자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곳곳에서 확인하며 살고 있다. 고목처럼 산 사람에게 자꾸 무심코 쏟아내는 내 속의 존경심과 부러움을 숨길 수가 없다. 길이 아닐 때는 멈추고 다른 길로 갈 용기가 필요하고, 이거다 싶으면 계속 눈과 귀를 막고 갈 용기가 필요하다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무엇이 있었나 싶다. 아직도 비교하는 마음을 못 내려놓고 사는 못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누구에게나 밀려왔다 가는 파도에 잘 대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남은 해변의 모래는 이른 아침 나처럼 혼자 바다를 바라보고 해변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마음의 흔적 같았다.
이라는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를 읽었다. 나를 위로할 말을 찾고 싶었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플랜 A보다 플랜 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 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 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181쪽)
수학문제처럼 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답이 없는 각각의 인생 질문에 내 물음의 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 힘들 때마다 위로와 용기의 말을 찾아 인생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와이 추억여행은 저물어갔다. 당장 이 여행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미루는 것보단 한 발짝이라도 떼보는 게 낫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