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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May 20. 2024

하다 보니 할 만해졌다.

아침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41

"생각했던 것보다 막상 해보니 괜찮더라"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긴다"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 말이 백 번 천 번 맞다. 


딸의 녹색어머니 봉사를 나갔다. 1년에 한 번씩 피해 갈 수 없는 봉사활동이다. 학부모로서 참여하는 유일한 일인데도 은근히 부담스럽다. 울산에 살 때는 봉사자분들의 수고 덕분에, 그리고 코로나 19 덕분에, 봉사활동 없이 4년을 보냈다. 작년에 용인으로 돌아오면서 봉사활동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작년에 두 번했고, 올해는 한 번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학급에서는 봉사활동이 예정되면 알리미를 통해 학부모가 날짜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선착순으로 선택을 하고, 나머지는 랜덤으로 지정된다. 아이들이 덜 다니는 곳을 선호한 나였다. 올해는 알리미에 회신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후 배정표를 보고 예상했던 결과를 받자 딸에게 알렸다. 


"어떡해, 엄마가 공공보행로에 당첨되었어. 기피하는 장소라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어."


2017년에 준공된 아파트지만 지상으로 차가 다니기에 아이들의 등하굣길에 신경을 쓴다. 학생들의 70퍼센트가 지나가는 중요한 통행로이다. 아파트 주민과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노출되는 장소라 부끄럼이 많은 나는 피하고 싶었다. 나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갈 테지만 넓은 광장에 깃발 들고 서 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지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편치 않았다. 건망증을 탓해봐야 소용없는, 그 자리에 서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일찍 마치고 경비실에서 조끼와 깃발을 찾아 내 자리로 갔다. 


8시 20분부터 9시까지 통행지도를 한다. 시작 5분전에 도착한 나는 봉사자분과 인사를 나눴다. 연세가 꽤 있어 보이셨는데도 매일 나와서 봉사활동을 하신다니 하루 나오면서도 힘들게 느낀 내가 부끄러웠다. 중요한 곳이라 나 말고 한 명 더 배정되어 있었으나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봉사자분과 호흡을 맞춰 깃발을 올리고 내리고, 아이들을 보내고 멈추고를 하는 일에 빠져 그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근처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음에 새삼 놀랐다. 작년에 두 번 해봤다고, 그리고 혼자 멀뚱멀뚱할 때보다 같이 서서 한다고, 어느새 자신감 있게 차를 통제하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켜 주느라 늦었다는 딸 반 엄마와 웃음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의 임무에 열중했다. 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중학교로 등교하는 중학생들도 그 길을 건너갔다. 초등학생보다 더 늦게 가는 중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8시 40분이 넘어서도, 50분이 되어서도 느긋하게 걸어가는 학생들을 보고 노인 봉사자가 "지각이다, 얼른 가라."라고 재촉해도 뛰어가는 학생 하나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지나갔다. 어떤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궁금할 정도로 가끔씩 옆으로 지나가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학생들이 고마워 한번 더 쳐다보기도 했다.


8시 55분이 되자, 노인 봉사자분은 먼저 자리를 떠나셨다. 핸드폰을 확인하면서 가시는 뒷모습에 속으로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들리지 않을 말을 전했다. 9시가 되자 우리도 자리를 정리했다. 같이 서 있던 엄마는 봉사가 낯설다고, 외국에서 살다와서 처음해 보는 거라고, 본인은 뒤쪽 아파트 주민인데 원하는 자리를 선택하지 못해 집 앞을 놔두고 여기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나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저도 외국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살다와서 봉사를 몇 번 해보지는 않았는데,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네요. 그리고, 저도 선택하지 못해 여기에 배정받았어요."

그리고 마음속에 추가한 말이 더 있었다.

'기피대상이던 여기도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네.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네. 오히려 없던 자신감도 생기고. 내년이면 녹색어머니활동도 마지막인데 딸의 초등생활을 기념하며 그때 다시 이곳에 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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