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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May 26. 2024

시어머니와 며느리 생일이 같을 때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44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내일이 엄마 생신이라 생각나서 전화했어, 엄마한테 다녀왔니?"

"아뇨, 내일 동생들이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요."

"엄마한테 안부전해드려."

"네. 고모가 생신축하전화 드렸다고 전할게요."


고모는 올해도 잊지 않고 엄마의 생신을 기억하셨다. 시누이가 올케 생일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기억해도 안부 전화 없이 지나갈 수도 있을 텐데 장사하느라 바쁜 고모는 한해도 거르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막내딸인 고모는 아빠 혈육 중에서 가장 정이 많으시다. 어쩌면 며느리인 엄마한테 빚진 미안한 마음 때문일지도, 그저 본인의 엄마가 생각나서 그러실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와 엄마는 태어난 날이 같았다. 철이 들고,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 음력 4월의 어느 날은 달력에 표시되는 날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것도 고부관계인 여자 둘이 365일 중 한날을 기념하며 사는 게 보통 인연은 아닌 듯 싶었다. 


할머니는 아빠가 9살 때 청상과부가 되어 진도에서 힘들게 자식 넷을 키우셨다. 장성한 자식들이 집을 떠난 후 고향에서 한동안 홀로 사셨다. 눈에 밟혔을 장사하는 막내딸을 돕기 위해 인천 고모집에서 10년 넘게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셨다. 한편, 서울 단칸방에는 다른 막내딸이 서럽게 살고 있었다. 18살에 친정엄마를 여읜 우리 엄마도 비슷한 시기에 자식 셋을 낳았지만, 미역국 끓여줄 사람이 없어 제대로 산후조리 한번 못했다. 할머니는 기다리던 손자인 남동생을 낳았을 때도 오지 않으셨다고. 엄마가 할머니가 된 지금도 할머니의 말들은 엄마의 가슴속에 박혀 살아있는 듯했다.


"너는 왜 아들을 못 낳니? 내 딸들은 시집가서 바로바로 아들만 잘 낳는데?

 너는 집에서 놀고 내 딸은 고생하니 그 집 가서 애들 봐 줄란다."

 

할머니는 철저하게 딸바보였고, 그 딸이 막내고모이다. 할머니가 조금만 엄마에게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었더라면, 엄마가 덜 외롭게 따뜻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한다. 더구나 아빠는 효자중의 효자여서 할머니가 고모네 집에서 일하다 다치시면 매번 모셔와 말끔히 치료하셨다. 건강을 찾으면 할머니는 다시 고모집으로 가셨다. 할머니 생신이 되면, 아빠는 고모들이 사는 인천으로 달려가 대가족을 모아두고 밥을 사거나 우리 집에 모두를 초대해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생신밥을 먹었다. 엄마 생신은 할머니 생신에 가려서 존재감이 없었고, 우리들이 대충 챙기는 정도였다. 아빠가 조금만 더 자상하게 엄마를 챙겼더라면 엄마의 서운함도 덜했을 텐데, 효자 역할에만 충실한 무관심한 아빠는 아내의 빈 마음은 헤아려주지 못했다. 


할머니는 고모네 집 계단에서 넘어져 대퇴골절로 여러 번 수술 후 우리 집에서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엄마와 우리들이 거동을 못하시는 할머니 목욕을 시켜드리고 수발을 들었다. 우리들이야 학교 가고 집에 없으니 순전히 엄마가 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이 한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의 생신만 기억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그날이 되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막내 고모는 매년 엄마 생신이면 잊지 않고 전화를 하신다. 엄마의 생신을 기억하며 할머니도 아빠도 떠나고 혼자 남은 엄마에게 안부를 전한다. 생일이 같은 덕분에 뒤늦게라도 생일 인사를 받고 있다. 서로 관계가 애틋하듯, 불편하듯,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생일은 따로 챙겨야 제맛이다. 각자 태어난 소중한 날을 기억하고 얼굴을 마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이다.


엄마의 생신. 자식들이 다 같이 모여 오랜만에 밥을 먹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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