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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l 02. 2024

장대비를 뚫고 간 곳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71

예고된 장맛비가 세차게 내렸다. 거실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갈까 말까 잠시 생각했다. 거울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힘없이 숱도 없는 머리가 어깨선까지 길자 흰머리와 섞여 과장 한 스푼을 보태자면 산속에 사는 자연인이 따로 없었다. 버틸 만큼 참았다 싶어 예약한 곳을 향해 갔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10분 정도 걸어가는 동안 이미 바지단은 젖고 우산을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바람막이겉옷도 젖었다. 뻔히 젖을 줄 알면서도 나와 보니 역시나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거리는 한산했다. 집에 있어도 마음은 비에 젖을 것 같은 날이었다. 지하철 여섯 정거장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이전보다 배나 세차게 내렸다. 목적지는 1층 상가에 위치한 가발집인데, 사방에 물이 고여 어디다 발을 두고 건너야 할지 1초마다 생각해야 했다. 


우연히 소개받은 가발집에서 염색과 커트를 한꺼번에 한다. 항암 가발을 버리고 가끔 있는 공식적인 행사에 쓰고 갈 가발을 구입하러 작년봄에 찾아갔다. 그 후 두 달에 한 번씩 찾는 단골가게가 되었다. 가발을 판매하고 손질하는 것은 기본, 커트와 파마도 한 번에 가능한 맞춤 공간이다. 예전 가발은 가끔 집에서 세척하고 쓰면 그만이었다. 새 가발은 화장대 밑에서 먼지를 덮고 방치되다가 애들 학교 행사 때만 쓰고 다닌다. 부족한 머리숱을 보완하기 위한 용도로 부분 가발을 구입했기에 머리카락이 길면 가발에 맞춰 다듬어줘야 한다. 1년 정도 가발집에 다니면서 가끔씩 마주친 손님들은 나와 같은 처지의 암경험자이거나 탈모 경험자였다. 이곳에 올 때마다 피부로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중요성! 손님들은 휑한 정수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채워 넣고 싶은 마음에 가발로 덮고 한결 풍성해진 모습을 하고 문을 나섰다. 난 그렇지 못했다. 어색했다. 기성품이 아닌 맞춤 가발을 썼으면 안 그랬을까? 익숙해지면 괜찮다는 사장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로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게 편하다. 자라는 흰머리와 끄트머리 다듬기를 위해서 이곳을 찾으니 가발 손질보다는 머리 손질로 방문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숱이 적은 머리라도 스타일을 위해 통 크게 지출해 볼까도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계속 하나다. 모자 쓰고 다니는데 커트와 염색에 십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지출할 수가 없다. 머리카락이 좀 더 풍성해지면(?) 그때 가자고 달래면서 저렴하게 이곳에서 한 번에 염색과 다듬기를 끝낸다. 


가발집 풍경


사장님과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뉴스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가끔은 큰 언니 같은 푸근함에 속 끓이는 이야기를 하면 답이 나올 때도 있고 그저 입 밖으로 꺼낸 것만으로 시원할 때가 있다. 미용실로 시작해 가발집 겸 미용실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인생이야기도 가끔씩 듣는다. 젊어서는 가장 노릇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주변 친구들과 달리 기술 덕분에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해 행복하다는 말도 잊지 않고 첨가하신다. 독립적인 인생,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나이 들어갈수록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부족한 머리카락은 가발로 가릴 수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자식을 비롯한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은 자신을 초라하고 작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폭우가 쏟아졌지만 할 일을 끝냈기에 상관없었다. 다행히 집 앞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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