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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l 17. 2024

아이 하나를 가르치는데 가족 전체가 필요하다?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80


40대를 사는 지금, 지인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자녀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랬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에서 "공부 잘하는 자녀가 되다오"로 옮겨 탄다. 남편은 가끔 이야기한다.

"애들을 키워보니 중고등학생 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

"회사에서도 점점 애들 대학 간 이야기에 관심이 가더라."


부모는 "스스로" 공부를 "잘" 하는 자식을 바란다. 어느새 부모의 로망이 되어버린 "자기 주도학습"을 하면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어디에 있는지 주변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 아이들은 어느 별에 살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저 바라고 또 바란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되고 싶다고 말만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부자가 되는 길을 배우고 노력하는 과정은 뛰어넘고 부자가 된 결과만 바라는 건 아닌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해 부모의 역할과 태도가 집집마다 얼마나 다른지 놀라울 때가 많다. 스스로 안 하니 학원의 힘에 기댄다는 집이 대부분이다. 부모의 간섭에 거리를 두면서, 부모자식 간의 친밀감도 멀어지는 듯하다. 


고등학교 동창의 이야기는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떠오르게 했다. 친구는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의 공부를 전 과목 과외처럼 관리하고 지도한다.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호주와 인도에서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이의 공부에 관심을 쏟았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영어와 수학을 사교육 없이 학교 방과 후 수업과 가정학습으로 시킨다. 시험기간에는 학원에서 준비해 주는 기출문제 배부와 풀이를 본인이 온라인 카페에서 출력해서 아이에게 풀리고 오답을 확인한다. 수행평가도 과목마다 꼼꼼하게 봐준다. 영어와 사회는 아빠 담당, 국어는 고모 담당, 수학과 과학은 본인이 한다고 했다. 엄마의 열성만큼 믿고 따르는 아들은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다. 아이가 등교한 시간에는 선생님이 수업 준비하듯 온라인 카페를 방문해서 공부에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한다. 방과 후에는 스케줄에 따라 학습을 진행하며 올 A라는 내신관리를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 듣기만 해도 공부시키는 엄마의 모습만 있을 뿐 스스로를 위한 생활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스터디 카페에 아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뭘 하는지 안심할 수 없다고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학습관리자의 모습이었다. 나와는 너무 달라서, 될 수도 없고, 사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은 엄마의 역할을 수행 중이다. 친구지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게 놀라워 듣고 있는 내내 내 모습을 되돌아봤다. 엄마에게 의지해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아들이 언제까지 받아먹기만 할 수 있을지, 어떤 아들로 성장할지가 미지수이다. 중학교는 어떻게 끌고 간다 해도 고등학교까지 지속가능할까? 아이는 계속 엄마만 의존해도 괜찮을까? 친구의 방식대로 아이를 끌고 가지 못하고 아이에게 상당한 주도권을 준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오히려 반발이 더 컸다. 아들만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엄마가 주도권을 잡는 학습 대신, 우리 집은 아들이 공부하는 엉덩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공부 정서를 헤치지 않게 살피는 중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손을 내밀 때만 잡아주고 이끌어주고 있다. 어차피 공부라는 깊은 숲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기에 부모로서 성급히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후회될 때도 가끔 있다. 어릴 때부터 엄마말을 잘 듣게 많이 시켰어야 하나, 책을 많이 읽어주고 독서라도 강제로 시켰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등등. 어릴 때부터 막 끌어당기지 않았기에 사춘기 아이를 끌어당기는 반발만 사고 끌려오지 않는다. 기다리고,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경험과 조언을 해 줄 뿐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 공부는 알아서 잘했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과 살아갈 목표대해 조언해 코치가 옆에 없었다. 그에 비해, 아들에게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언제든 코칭해 아빠가 든든하게 지원군으로 있어 다행이다. 남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하게 보일 아들이지만 희망이 보여 지켜보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지금은 동기부여가 안 돼서 열심히 안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학원숙제만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답답할 때도 있다. '이왕 하는 거 조금만 하지'가 속에서 생겼다가 사그라드는 일이 되풀이된다. 그럼에도 또래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역사를 가장 좋아하고 뉴스를 챙겨보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아들이 말하는 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는 부모가 바라는 대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차츰 변해갈 것을 믿기 때문에 아직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을 믿고 싶다. 삶의 주도권은 본인 스스로가 잡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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