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음은 엄마 마음일 뿐, 딸아이의 작은 발걸음은 슬로 모션용 장화를 신은 것처럼 느긋하다. 아니, 1분이라도 늦게 가고 싶다고 몸으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목감기를 달고 있다. 도착한 소아과에는 대기환자가 세 팀뿐이라 늦어도 9시에는 교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어 보였다. 진료가 끝나면 바로 운동하러 갈 생각으로 운동복을 입은 채 나왔다. 이렇게까지 운동에 진심인가 싶었지만 일주일에 세 번 가는 운동이니 만큼 꼭 가야 한다는 의지가 타오르는 중이었다. 물 흐르듯, 순조롭게 모든 게 진행되었다. 진료받고, 약 받고, 그 자리에서 가루약을 시럽에 타서 먹이기까지 했다.
아직 시간은 9시 10분 전!
그때부터 아이의 푸념소리가 이어졌다.
"학교에 안 가고 싶은데..."
"1교시라도 빠지고 싶은데..."
"우리 집은 결석이 없어."
돌아오는 건 시큰둥한 반응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진짜 가기가 싫긴 한가보다. 아이의 눈을 쳐다보면 쉽게 마음이 약해진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애써 외면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럼에도 난 지지 않았다. 갈 만하니까 가라고 하는데도 미적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독한 엄마가 된다. 물렁물렁, 우유부단, 이런저런 입장을 고려하며 대체로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았다. 그런 내 목에 힘주어 주장을 펴는 게 있다면, 바로 내 자식만큼은 성실한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열나서 앉아 있기도 힘든 아픈 아이를 학교에 억지로 보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만큼 매몰차지는 않다. 그저 습관성 지각과 결석의 씨앗을 아이들 마음속에 심지 않았을 뿐이다.
요즘 시대, 특히 코로나 이후에는 학교생활에서 지각과 결석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학생도, 부모도, 학교도, 어느 누구 하나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예전과 달리 아픈 몸을 끌고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가서 힘들게 긴 하루를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픈 애들이 학교에서 타인에게 방해가 될까 집에서 쉬라고 하는 교사도 있고, 교사의 마음처럼 부모가 알아서 다른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손쉽게 병원에서 진료확인서를 받아 제출하고 자율적으로 학교 밖 체험을 목적으로 체험학습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늦잠 자서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도, 머리가 아프다는 꾀병을 핑계로 학교에 안 가는 아이까지도 본인 이외에는 확인할 길이 없기에 편히 집에서 쉬다 학원에 갈 수 있다. 이제는 근면성실함이 미덕이며 자랑스러워할 시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학교라는 세계에서는 자칫 부끄러운 행위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유별나게 학교에 보내는 고지식한 부모로 살아가는 중이다.
개근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누가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강제성이 사라져서 오히려 자발적인 성실성을 키우기에 장애물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쉽게, 편하게, 빨리 결과를 얻고 싶은 욕망만을 보여주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학교라는 터전에서 성실함을 배우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도와주고 싶다. 근면성실한 부모밑에서, 개근상의 수여자로 살아보니 그랬다. 성실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 덕목이 아니었다.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무기였다. 대단하게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인생을 살지는 못하지만 성실함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인 나는 독하게 굴면서까지 딸아이가 성실성이 몸에 밴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벌써부터 틈만 나면 스마트폰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뒹굴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유튜브와 쇼츠를 보며 부러워하기만 할 뿐, 노력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근면성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하루이틀 게으르게 살 게 아니라서 가르쳐야 한다. 지루하고 답답해 보이는 성실함이 결국 괜찮은 나를 만드는 필수적인 태도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다. 사소하게 보이는 루틴을 쭉 이어나갈 수 있는 성실한 자세야말로 일상을,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이라고 오늘도 몸소 보여주는 중이다.
종종걸음을 치던 나는 건강을 위해 운동하러 가고, 아이는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서로 성장하기 위해 각자의 길로 잠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