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14
"엄마, 아줌마 송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아! 오랜만에 집에서 만든 송편을 보니 반가운데!
이거 좀 봐. 우리가 만들었던 송편과 비슷해, 진짜 쑥이 많이 들어간 게 느껴져. 깨송편이랑 콩송편이야!"
엄마보다 내가 더 반가워했다. 호들갑스럽게 포일에 싸인 송편을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모양도 맛도 옛 맛 그대로였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알록달록 색을 입혀 예쁘게 찍어만든 송편이 아니라 손으로 빚어낸 울퉁불퉁한 송편을 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동네 이웃이던 아줌마가 전해준 송편에서 엄마와 함께 만들던 송편이 떠올랐다. 그 시절 우리 집 송편이 돌아온 것처럼, 큰 걱정 없이 살던 그 시절의 송편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출렁거렸다. 추석 때마다 엄마와 우리 자매는 송편을 빚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할머니까지 여자 넷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곤 했다. 봄내 할머니와 엄마가 캐 온 쑥을 넣은 송편 모양은 참 가지각색이었다. 할머니 송편은 지짐만두처럼 가장 크고 넓적해서 매번 웃음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엄마와 우리가 만든 송편도 자랑스럽게 선보일 정도로 가지런히 이쁘지는 않았다. 가끔 집에서 송편을 빚고 찌고 하는 일이 번거롭고 힘들기도 했지만, 못생겨도 맛은 있었다. 참, 부드럽고 달달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셋이서 소박하게 송편을 만들며 가끔 할머니 송편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제는 엄마와 만들던 송편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줌마는 친정동네에서 30년 넘게 건어물 가게를 하시는 분이다. 가게에 나가지 않는 오전 시간에 주로 뒷산에 함께 다니셨다. 봄에는 쑥을 캐고, 가을에는 도토리와 밤을 주우러 다녔던 두 분은 서로 의지하며 언니동생으로 지냈다.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살던 동네를 떠나온 후에도 아줌마는 엄마의 안부를 물으시며 수원과 용인으로 병문안도 몇 번 오셨다. 여전히 동네 소식도 전해주며 서로의 안부를 잊지 않고 전하신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보고 몇 해가 지나갔다.
추석에 엄마가 외박을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줌마와 연락이 되어 옛 동네 부근에서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마침 아줌마 댁이 내가 졸업한 중학교 근처라 오랜만에 학교도 볼 수 있었다. 이정표처럼 서 있던 문제집 사러 들락거리던 익숙한 서점과 학생들이 줄 서서 먹던 패스트푸드점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변한 듯, 낯선 동네가 되어 있었다. 여기도 바뀌고, 저기도 바뀌고, 내가 이 학교를 다녔었나 싶게 사방천지가 낯설었다. 하긴, 15살 소녀였던 내가 중년이 되어 나타났으니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이나 변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나도 10여 년 만에 만난 아줌마가 이모처럼 반가웠는데, 엄마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코로나 19 이전에 만났던 아줌마를 보자마자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셨다. 자주 못 보는 자매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동네 지인을 만난 엄마는 아이처럼 웃고 울고를 반복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도 엄마의 마음이 전해진 것처럼 요동쳤다. 엄마가 늘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줌마는 여전히 마음이 푸근하고 넉넉하셨다. 챙기고 보듬고 하는 일을 평생 하신 분인 게 몸에 배어 나타났다. 엄마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며 한창 바쁠 추석연휴에도 기꺼이 송편과 전을 바리바리 싸들고 엄마를 보러 오신 그분의 마음에 우리 모두 감사했다. 우리가 먼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다. 다음 추석을 기약하며 소중한 인연을 가슴에 새겼다. 송편을 볼 때마다 아줌마의 마음씀씀이에 절을 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유일하게 남은 좋았던 시절의 동네 친구.